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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김정 Dec 11. 2024

여자에게 무례하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십시오(최종)



(전편 줄거리 10초 요약 : 과 MT를 여대와 조인으로 가기로 하는데, 과 여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 여파일까요. 출발 당일, MT 일행을 싣고 갈 셔틀버스의 운전기사들이 전날 술로 뻗어버려 가지 못하게 됩니다. 여대쪽 과대표가 무슨 수가 있다는데 그건 과연 무엇일까요.)       



     

터미널에 도착하자 놀라운 광경이 우리를 기다렸습니다.

뭘까요.

대합실이 주말 나들이객으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던 거죠.

바야흐로 인산인해였습니다.      


“뭐가 이렇게 사람이 많아.”

우리는 넋 놓고 있다가, 누군가 “짐을 여기다 내려놓죠.” 하는 목소리에 깨어, 그제서야 짐들을 대충 한구석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냥 사람들 다니는 길에 부려놓았다고 보시면 되죠.     


그런후, 화장실에 가네, 간식과 물을 사러 가네, 그 다음은 어떻게 할거냐, 한마디씩들 떠들었습니다. 이것도 큰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안은 인파 소음으로 멍멍할 정도였죠.

어디선가 “울 똥강아지야!” 하는 소리가 들리면, “으와앙!!” 하고 어린애가 울고불고, 난리도 아닙니다.

명절대목 시장바닥 북새통 전쟁통 같습니다.

그때.     


“모두 제 말 들어요. 짝짝짝.”

이 와중에 박수를 치며 시선을 모은 이가 있었으니, 여대 과대표였죠.

“각자 볼 일 보시고, 20분 후에 다시 모이는 거로 하죠. 알겠죠.”

자기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할 말만 간단히, 그리고 낭랑히 말했습니다.     


“어, 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의 커다란 목소리가 반문합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기를 함 보세요.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있어요?”

어떤 상황인지 알고있냐니요? 대관절 뭔 말이죠.     

우리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가리키는 방향을 봤습니다.


시외버스 운행 현황판입니다.

현황판에는 시외버스의 행선지별로 출발 시간들이 빨간 불로 나와있었죠.

이미 출발한 것은 종료라고 돼있고, 나머지는 판매중이거나 매진으로 되어있는, 그런 현황판이요.     

그런데 말이죠. 문제는 현황판 대부분 매진이란 겁니다. 늦은 밤시간을 빼고는.   

  

“설마.”

“허억!”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뭘 말하는지 알 것 같았거든요.


MT 행선지를 재빨리 눈으로 찾았죠

저희 꺼는요

물론 매진.

타려면 밤 9시까지 기다려야...쩜쩜쩜.     


오늘은 주말입니다. 게다가 화창한 초가을의 토요일이고요.

놀러가기 좋겠죠.

그러니 그런 주말을 즐기려는 나들이객들이 한꺼번에 몰린 건 당연.

아뿔싸.

네 아뿔싸가 맞습니다.

버스는 끝이란 겁니다.

그럼 기차는?     


“이봐 과대표.”

목소리의 주인공이 과대표를 향합니다.

“저런 상황인데, 우리가 갈 수 있을까. 여기서 밤 9시까지 주구장창 기다리던가. 아니면 청량리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던가. 근데 기차도 과연 있을까.”

없겠죠.

이걸 두고.

안봐도 비디오라고 하는 거죠.     


우리가 순진했습니다.

애초에 대학 셔틀버스를 빌리려 했던 이유가 이맘때 시외버스나 기차는 단체 표로 잡기 어렵기 때문에 고른 선택이었다는 걸, 어째서 잊었을까요. 그 중요한 걸.

여기 터미널에 와봐야 소용없다는 걸 말이죠.     


아, 아. 이 무슨 건망증이란 말인가요.

왜 굳이 우리는 여기까지 온 건가요.     


이곳으로 오자고 했던 과대표를 봤습니다. 모두가. 원망의 눈으로.

안할 고생을 사서 한 거네 하고.     


“뭐야, 뭐. 왜 날 그렇게 쳐다보는데. 내가 여기로 오자고 한 게 아니야.”

그럼, 누가 오자고 한 건데요.

우리가 잘못 들은 건가요. 분명 한시간 전에 과대표가 여기로 오자고 했는데요. 이제서 발뺌을 하신다.     


과대표는 여대 과대표에게 구원의 시선을 보냅니다.

우리도 그녀를 보았죠.

그녀도 공범이겠죠.

뭐든 답을 하셔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그걸 눈치 챘는지, 그녀는 즉답했습니다.     

“제가 여기로 오자고 한 거 맞아요. 제가 오자고 했어요.”

당당하네요. 왜죠?

과대표는 거봐 하고 있고요.

“저건 다 예상한 일이에요.”

헉. 예상했다고?

“그러니 제가 아무 방법도 없이 여기에 오자고 했을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도리 도리.

“그렇다면 저를 믿어보시고, 20분 뒤에 다시 만나자는 거예요. 여기서 누구 탓이니 하는 것보다 빨리 행동에 옮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시간도 없는데.”


대체 어떤 방법이 있다는 걸까요. 20분 뒤에.

다시 물어볼까요.     


하지만 비장의 한수를 숨긴 그녀에게 그 다음을 묻는 건 왠지 실례일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그녀가 하는대로 놔두는 게 나을 것 같았죠.

또다시 이러쿵 저러쿵, 훈수 두듯 그게 되니마니 하는 건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라는 예감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그녀는 분명히 뭔가를 주머니 속에 갖고 있는 게 틀림없는 거죠.

그리고 사실 우리들이라고 뭐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감나라 대추나라 할뿐.

시간도 문젭니다. 벌써 2시가 다 돼갑니다. 오전 11시에 출발하자는 게 3시간이나 흘렀어요.

일단 그녀 말대로 합시다.

“오케이, 그럽시다.”     


그렇게 우린 헤어져 각자의 용무를 보았죠.

그리고 정확히 20분 뒤에 짐이 있는 곳에 다시 모였습니다.


여대 과대표는 이미 와서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우릴 기다리고 있었고요.

다 모인 걸 확인하자 그녀는 앞장을 섰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짐을 들고 묵묵히 이동했습니다.

뭔가 나오겠죠.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지만요.     


터미널 속의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줄을 지어 한참 걸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안되겠는지, 복잡한 대합실을 피해 숫제 바깥 승강장을 걷기 시작합니다.

이미 만원인 버스들을 하나씩 지나치고요.

춘천, 인제, 원통, 속초, 원주, 평창...이런 행선지 팻말들을 지나쳤어요.

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승강장들을 죄다 지나가고 있는 거죠.

혹시 저희를 이북으로 이끌 여간첩 뭐 그런 분 아니시죠.

저 끝에 원산행, 개마고원행이 나온다든지.     


어쨌든 불길한 걱정이 들 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결국 당도한 곳은.


승강장을 다 지나치고, 버스 정비소였습니다.     


여긴 왜?

의아했죠.     


설마 여기서 버스를 만들어서 가겠다는 건 아니겠죠.

“너네들 공대지. 정비소에서 버스 한 대 후딱 만들어봐. 이런 이쁜 여자들 앞에서 그런 것쯤 못할 거 없잖아.” 하고요.     


그런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습니다.

대신 뭔가가 있었죠.

외따로 서있는 버스 한 대.

저건 뭘까요?

대체 뭐하는 버스일까요.     


사연은 이렇습니다.

터미널에는 한두대씩 비상용 예비버스란 게 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출발하려던 버스가 고장나는 사고도 대비하고, 탑승객이 몰리는 노선에 긴급 차량을 넣기도 하는 예비버스였죠.

요컨대 어떻게 터미널과 얘기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비상용 예비버스를 전세버스로 과감하게 빌린 것이죠.


여대 과대표는 그걸 생각해낸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지요.     

여대 과대표를 다시 보았습니다.

일단 여간첩은 아니고.

머리가 비상한 걸 떠나 과감한 행동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 과대표는 뭐 한 게 있다고 덥다며 쭈쭈바를 빨고 있고요.

이럴 때 리더는...... 됐습니다. 이젠 제 입이 아픕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물론.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어떤 문제냐고요.     

버스가 한 대였단 거죠.

뭘까요.

저 버스는 최대 45인승이란 겁니다.

우리는?

여학생 절반이 갔다고는 하지만, 눈 짐작으로 봐도 60명은 훨씬 넘을 겁니다.

저 한 대에 우리 모두가 탈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는...     


“야! 우리 남자들이 기사도를 발휘하자고. 개인 짐은 짐칸에 모두 때려놓고, 남자들은 두좌석에 세명씩 끼여앉아.”

과대표입니다. 이럴 때만 나선다는 기분입니다만.

어쨌든 그렇게 따릅죠.     


버스에 모두 올라타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딥니까.


갑시다.

드디어 출발.     


잠시만.     


근데 운전기사는요?

운전석이 썰렁 비어있습니다.

운전기사는 어디 있는 거죠?

음.

기다려야겠군요.


우린 모두 버스에 대기한 채 운전기사를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째깍째깍 흐릅니다.


또다시 운전기사 악몽에 둘러싸입니다.

이러다 트라우마 걸리겠습니다.     


한참을 안옵니다.

또 뻗었나요?     


슬슬 불안해지려는 찰라, 앞문으로 누군가 탑니다.

칠순은 넘어 보이시는 노인분입니다.


“저기, 이건 경로 관광버스가 아닌데요. 어르신.”

노인이 저를 째려봅니다.


건너편 여대 과대표가 말합니다.

“이분이 기사님이세요.”     


“하아.”

누가 한숨을 내쉽니다.

다행이라는 건지, 아니면 아니라는 건지, 모를.

일단 운전기사가 온 거로 합시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칠순이라.

옛말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도에 어그러지지 않는 것이 칠순, 고희, 종심이라 했습니다.

위안이 되는 말은 아니지만요.     


그런데 말이죠. 정작 걱정할 것은 나이가 아니었다는 걸 바로 알았습니다.

뭐였냐 하면요.


이 분이 소위 작은 키에 깡마른 몸에, 뭐랄까, 이게 전체적으로 너무 작으신 겁니다. 예전 분중에 체격이 몹시 왜소해보이시는 분들이 계셨잖아요.

통아저씨라든지. 대충 그런 분인 거예요.

그게 뭐가 문제냐고요.


처음엔 저도 특별히 신경을 안썼는데, 저분이 정작 버스 핸들을 잡으니까, 살짝 걱정이 되는 거예요.

핸들을 끌어안듯 잡으면서 브레이크는 밟고 계신 건지, 악셀은 누를 수 있는지, 기어로 손은 가는지, 사이드 미러는 보이는지, 바로 앞은 보이시는지, 운전 면허는 갱신하신 게 맞는지 하는 걱정인 거죠.     


그렇지만 그런 걱정은 아랑곳없이 노인 기사님께서는 하얀 장갑을 깔끔하게 깔맞춤으로 끼시며.

“카아악! 퉤!”

반쯤 열린 운전석 창문 밖으로 가래침을 오질나게 내뱉었습니다.


그리고 모자챙에 세월의 때가 반들반들 묻어있는 새마을 모자 같은 걸 눌러쓰시곤, 앞을 응시했습니다.

그리고 뭐랄까. 그 표정이 말이죠.

비장함마저 들어보인다고 할까요.

마치 내 생애 운전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는 느낌이랄까.

제가 앞자리라 다 보였어요. 쓸데없이.

괜찮겠죠. 정말.     


헌데 터미널 주차장을 나갈 무렵입니다.

“야이, 개자식아! 어딜 기어들어와!”     


아니,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도에 어그러지지 않는 것이 칠순, 고희, 종심이라 했는데.

그런 노인께서 돌직구 욕사발을 망설임없이 날리시다니.

버스 안의 기껏해봐야 스무살 약관, 방년의 남녀 젊은이들은 그냥 얼어붙어버렸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운전은 그럭저럭 하셨다는 겁니다. 그럭저럭.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야이. 그지같은 새끼들아. 깜빡이는 뒀다 뭐하냐고. 옘병할. 크악! 퉤!”

대신 욕 듣다 심장마비, 멘탈 붕괴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이것들은 길바닥에 왜 달구지들은 갖고 기어나오냐고. 지랄, 지랄, 젠장할.”

무사히만 가기를 바랬습니다. 제발.      


주말이라 경춘가도로 들어서도 숨이 막힐 것처럼 밀렸습니다.

그래도 일단 가고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밀린다고 해서 후진하지는 않을테니까요.     


대신 이게 MT 가는 버스일까 싶을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게임도 할텐데, 그런 건 일도 없었죠.

만석에 끼어 앉아서인지, 일단 움쩍 달싹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배가 고팠습니다. 매우.

점심을 거른 상태잖아요.

원래 일정이라면, 오전 11시에 출발해, 1시 정도 도착해서 밥을 해먹을 생각이었죠.

근데 지금은 3시가 넘은 거죠. 팔당댐을 지났나, 안지났나 하는데요.

그동안 우리는 과자 부스러기 말고는 아무 것도 못먹었어요.

거기다 짐을 들고 학교에서 터미널까지 오느라 힘도 쥐어짰고요.

배가 무지 고픈 게 당연합니다. 그러니 기운도 없고, 뭐를 할 여력도, 의욕도, 생각도 없는 거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배고픔과 피곤함을 참으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버스 안은 정적이 “위이잉.” 하고 흘렀죠.

아주 가끔 “아, 저 새끼 끼어드는 거 봐라.” 하는 칠순,고희,종심 노인의 욕지거리가 들려오고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요. 에고.     


그렇게 우리를 태운 버스는 거북이지만 조금씩 목적지를 향해 갔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저 역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섬찟 멈추는 느낌이 들어 눈이 떠졌습니다.     

정말 버스가 멈춰있네요.


휴게소인가 싶었죠.

근데 창문에 오른쪽은 북한강이고, 왼쪽은 차들이 씽씽 달리는 도로였습니다.

도로 한복판인 겁니다.

뭐지요? 대체?     


그때 운전기사가 벌떡 일어나 앞문을 “치이익!” 열고 나가네요.

노인이라 일을 보시나 싶었죠. 아니면 하도 끼어드니까 열 받아서 담배를 피우는 걸지도 모르고요.

우리들은 다시 잠을 청하거나 기다렸습니다.


잠시후 그가 다시 버스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버스 못가.”     


엥?

난데없는.

못간다니요?

이 도로 한복판에서.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다들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왜 그러세요? 기사님.”

앞쪽에 앉은 여대 과대표가 정중히 물었습니다.     


운전 기사는 일상을 얘기하듯 덤덤히 말했습니다.

“보면 몰러.”

“네, 뭐를요?”

“뒤를 봐봐.”

우리는 일제히 뒤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뒷좌석에는 일군의 남학생들이 붙어앉아 끄덕끄덕 졸고있는데...     

“저기 검은 거 안보이냐고.”


검은 거.

뒷좌석 뒤로 검은 것이 있긴 했죠.

언뜻 보기엔 자외선 차단을 하는 가림막 아닌가 싶은데...

근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네요.

저건.     


“연기잖아. 버스에 지금 불이 난 거지. 불 났어, 학생들. 어여.”

너무 덤덤해서일까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얘길하는 것 같았는데요.

불이란 단어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파이어네요.     


“꺼억!”

“불이다!”
 “화재난 거라고!”

“불이 났다고!!”

“어디서?”

“여기 버스에서.”

“그럼 우리는 타 죽는 거네.”

“끼악!!”

“까아아악!!”

“탈출!!”     


독자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한 게 있었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어떤 얘기냐 하면요.     


이건 비상용 예비버스라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비상용 예비버스라는 건 평상시에는 운행을 안한다는 겁니다. 어쩌다 한번씩 운행하는 땜방용이란 거죠. 알겠죠.

여기서 질문.

이걸 거꾸로 말하면 뭘까요?

왜 평상시에는 운행을 안할까요, 왜 땜방용일 수 밖에 없을까요, 라고 말할 수 있겠죠.     


고로 이게 뭔 말일까요.

저게 대놓고 운행할만한 버스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왜 대놓고 운행할 수 없을까요.

그건 실은 당장 고장나도 할 말 없는 버스라는 거죠.

누가 멀쩡한 걸 예비로 쓰겠어요.

이해했죠.     


그래서 비상용, 예비용으로만 썼던 겁니다.

마치 운전기사도 비상용, 또는 땜방용인 것도 죄송하지만, 그런 비슷한 맥락인 거죠.


그걸 전세버스로 딱 한번만 쓸 건데, 비용은 쳐드릴테니 내주시면 안될까요 하고 여대 과대표가 설득을 한 거고요.     

그런데 결국 이 사달이 났던 겁니다.

하필이면 저 버스의 마지막 날이 오늘이 됐던 거고요.   

  

우린 혼비백산 버스에서 뛰쳐나왔습니다.     

“불이다, 불이야!”

“엄마야!!”

“나 살려!”

“빨리 도망쳐!!”     


“짐은 어떻게 해?”

그 와중에 누가 소리쳤습니다.

맞네요. 짐을 꺼내야 하네요.     


아래 짐칸을 열었더니, 검은 연기가 울컥 쏟아져 나옵니다.

연기로 자욱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저 안으로 들어가 짐을 빼낼 것인가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요.     


그때 노인 기사분이 아무렇지 않게 툭 튀어나와 손을 밀어넣더니 나무 갈코리를 꺼내어 짐을 앞쪽으로 빼내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아무렇지 않게.

작은 체구, 그리고 나이에 맞지 않게 잽싸고도 강단있는 행동입니다.

이분이 노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요.


아무튼 노인 감상은 그만하고, 옆에서 우리들은 토출구로 나온 짐을 서둘러 빼내었습니다.

하나라도 건져야하니까요.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가요.     


“뭐 큰불까지는 안갈 거고. 엔진이 고마해서 연기나는 거요. 이걸로 끝이지. 니도 그동안 수고많았다. 탕! 탕! 탕!”

버스를 향해 말하는 운전 기사의 얘기입니다.      

결국 버스는 연기를 울컥 쏟아내고 경춘가도에서 절명했습니다. 생을 다했습니다. 하필이면 우리가 MT 가던 날에요.

그래도 명복을 빕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어날랐을까요.

다음 생에는 버스가 되지 말고, 승객이 되렴 하고요.     


“이제 우린 어떡하죠.”

누군가 우리가 가장 묻고 싶은 말을 물었습니다.

물론 여대 과대표에게죠.


그런데 답을 할 그녀의 얼굴도 질려버린 표정입니다. 두손, 두발 다 든 거죠.

아무리 비상한 그녀라도 이런 것까진 생각지 못했겠죠.

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고, 성탄이 되어도요.

그녀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이해합니다.    

 

상황이 이러니 여학생들 얼굴엔 이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철철 넘칩니다.

남학생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렇지만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면 돌아가기엔 우린 너무 먼 길을 와버렸거든요.

무슨 노래 가사 같군요. 아무튼 그랬습니다.

북한강 강바람만이 우리를 반겼습니다. 쌔에앵 하고.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씨부럴, 내가 이제부터 버스를 잡아줄테니 그걸 타고들 가. 여행들 왔으니 가야지. 가서 재밌게 놀아야지, 안그래. 학생들.”

엥?

이 사이다같은 발언을 하신 분은?

나이 칠순, 고희, 종심의 통아저씨 같은, 운전 기사님이십니다.

    

뭐 말씀은 고맙지만요.

근데 버스를 잡아준다고요. 어디서요? 어떻게요?     


우리가 내려선 곳은 경춘가도 한복판 갓길입니다.

도로에는 자가용이며, 화물 트럭이 씽씽 달리고 있었죠.

대체 어디서 버스를 잡는다는 거죠.


설마 도로에 달리는 버스를 히치하이킹 무대포로 멈춰세워서 저희를 태우시겠다는 건 아니겠죠.     

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랬습니다.      


시외버스가 멀리서 다가오면 “워이, 워이” 새마을 모자를 벗어서 사정없이 흔들어 멈춰세웁니다. 이게 좀 격정적인 거래서 제가 버스기사라도 안설 수 없습니다.

안세워주면 도로 한복판에 대자로 누울 판이니까요.      


노인 기사는 멈춰진 버스의 앞문에 한발을 걸치고는, 얼굴을 외로 틀고.

마치 그 옛날 알랭드롱이 태양은 가득히에서 요트 갑판에 서있던 포즈마냥 눈부시게 버스기사를 바라보며 묻습니다.

물론 버스기사 분이 볼 땐 도로 한복판에서 버스를 세운 왠 미친 통아저씨이지만요.     


“너 동서울터미널에서 왔지. 얘네들 가야 하는 거기에 들를 거지.” 라고 통아저씨가 말합니다.

“그런데. 왜.”

“보면 몰라. 얘네들 태워.”

“알았어.”

쿨하죠.

이야. 이런 수가 있었군요.     


근데 버스에 좌석이 있냐고요.

당연히 없죠.

주말 매진이 된 만차잖아요. 그냥 입석으로 우겨넣는 겁니다.

그래도 가야죠.

돌아가기엔 먼 길이니 말이에요.  

   

근데 입석도 한도가 있었어요. 버너랑 코펠이랑 가재도구 살림까지 우당탕탕 들고 타려니, 십여명 타면 끝입니다.

출발. 탕! 탕! 탕!     


그리고 나머지 일행은 또 한참을 기다립니다.

생각보단 버스가 자주 지나다니지는 않았었죠.     

그래도 그게 어딘가요. 대충 상황을 가늠한 저희는 눈에 불을 켜고 다가오는 버스가 없는지 찾았습니다. 그 뒤는 통아저씨에게 맡기고요.


그러다 잡고보니 상봉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였습니다.

그래도 우리 쿨한 알랭드롱 통아저씨는 한발을 앞문에 삐딱하게 얹고 묻습니다.     


“거기 가냐?”

“가는데, 왜?”

“얘들 입석으로 태워줘라. 우리 탄 버스가 맛이 갔다.”

“너희는 동서울이잖아.”

“그렇다.”

“미친 놈. 동서울을 왜 태우는데. 뒤에 손님들 불만 들어오면 니가 책임질래.”

“책임질게. 태워주라고.”

“됐어. 문에서 발 안떼?”

“이런 식으로 하면 협회에 얘기할 거다. 너 이름이 김팔봉이네.”

“그래서 뭐. 내가 그딴 걸로 놀랄줄 아냐.”

“왠만하면 말 안할라고 했는데.”

“그럼 하지마.”

“아니 할 거야. 너 면목동 불도저라고 아냐.”

갑자기 얌전해지며, 끄덕끄덕.

“내가 걔 형이다.”

“알았어. 태워라.”

“근데 너.”

“왜?”

“말이 짧다.”

“그게...요. 태우세요.”     


그때 침착히 또는 강압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어주셨던 우리 쿨한 알랭드롱 통아저씨 운전기사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아무튼 이런 우여곡절로 MT의 목적지에 저희는 겨우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습니다만.


(여기까지 중편으로 끝내고 다음편으로 슬쩍 넘어가려 했지만, 지난번에 엄청시리 난리를 치셔서 최종까지 이어나갑니다^^)          




우리 모두 결국 모인 시간이 아마 6시 저녁 무렵이었을 거예요.


뱃가죽이 등에 붙을 정도로 배가 고프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상태라, 누가 뭐라고 해도 아무 것도 귀에 들리지 않았죠.

아닌 말로 불 구덩이도 헤쳐나왔으니 말이에요.

이거 MT 맞나요.

그래도 일단 누군가 밥 해먹자는 소릴 하길래 밥을 해먹은 것 같기는 합니다.   

  

버너를 켜네 마네, 가스는 어딨니, 가스도 없이 어떻게 켠다는 거네. 생각해보니 버스에 짐이 하나 빠졌네. 그럼 어서 가서 가스를 사오네 마네. 쌀을 씻네. 찌개를 끓이네, 삼겹살을 꿉네 그랬습니다.

일단 허기진 배부터 채워야 했으니까요.     


너무 배가 고파 영혼마저 털려버린 것 같고, 그렇게 지지고 볶고 해서 어떻게 저녁까지는 다 해먹었던 것 같습니다.

반주로 소주도 한잔씩 걸치고요.

그렇게 하니 시간이 대략 8시가 되었나요.


아직은 해가 긴 초가을이라지만, 밖은 거의 깜깜해졌습니다.

그러고 숙소 툇마루 같은 곳에 앉아있을려니, 그때서야 근처 어딘가 저희처럼 MT를 온 학생들이 하하호호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어두운 밤중에 그런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뭐랄까요.

마음이 착 가라앉고, 콧등이 시큰해진달까요. 서글픔도 아니고, 대체 이건 어떤 감정일까요.

그냥 눈물이 글썽여지는 게, 약간 현타가 왔다고나 할까요.


우리는 누구고, 여기는 왜 왔고, 여기서 또 무얼 하는 걸까 하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오전 11시도 안돼서 모여, 지금 밤 8시까지 우리는 대관절 뭘 했던 걸까요.

여기까지 열심히 오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굶주린 배에 뭔가를 우겨넣었고요.

그러고.

음.

끝.


“하하호호.” 아 진짜 저것들 조용히들 안하나.     


“여기서 이러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마침 그런 우리를 일깨우듯 누군가 제안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우리가 여대와 조인 MT를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그렇지. 우리는 여기 놀러온 거지, 하고요.

근데 그녀들은 어디에 있지요?

두리번 두리번.     


건넌방입니다. 여학생들끼리 모여 저녁을 해먹고 있었죠.

어, 근데 저 건넌방이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지.   

  

사실 점심도 거르고, 미치도록 허기진 배에 갑자기 밥을 허겁지겁 미친듯 처넣고, 소주까지 들이부우니 술기운도 평소때보다 더 취기가 오르고, 거기다 심각히 노곤해져왔습니다.

이제는 만사가 귀찮았어요.

뭘 또 여기서 하냐는 표정들이었죠.

그저 우리끼리 술이나 퍼마시면 안될까 하는 겁니다.   

  

그때 보다 못해 나선 것이 복학생 형들입니다.

과대표들이 이런저런 마음 고생하며 이 자리를 만들었는데, 계속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었던 거죠.

과대표를 앞세워 여학생 쪽으로 건너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얘기가 잘 됐는지, 얼마뒤 여학생들이 우르르 우리 쪽으로 건너오네요.

“원래 계획했던 거 합시다.”     


좋다.

기운냅시다. 우리 모두. 저렇게 여학생들이 나서서 오는데.     


조를 대충 나누고, 함께 둘러앉아서 통성명을 하고, 술잔을 나누었습니다.

그렇다고 분위기가 쉬이 올라오지는 않았죠.

눈을 비비고 앞의 여학생을 보고 있노라면.

오전에 셔틀버스 기사가 뻗어 망연자실하고,

동서울터미널로 꺼적꺼적 이동해서 전세버스를 탔고,

도로 한복판에서 버스에 불이 나서 허겁지겁,

아무 버스나 잡아주는대로 입석으로 피난 가듯 여기에 왔고,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어 눈알 튀어나오도록 밥이며 김치며 고기며 먹을 걸 미친듯이 입에 넣은 사람들이구나 했죠.     


그러니 갑자기 장기자랑을 한다는 둥, 누가 이별이니 사랑이니 그리움이니 노래를 부른다는 둥 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그저 조별로 “그랬나요? 그랬어요.” 하는 식의 조용한 담소와 술잔만을 나누었죠.

새우깡을 먹으며.      


이건 아닌 말로 장례식장 빈소 분위기였습니다.

아이고, 그러셨군요.

이런, 이런.

고인도 가셨으니 재취하셔야죠.

암요.

하고요.     


한참을 그러고 있었죠.

나중에 도저히 안되겠는지, 복학생 형들과 과대표들이 주동이 되어서 우리들을 모두 일으켜세웠습니다.  

   

“우리 이러지말고 나가자고요. 바람좀 쐽시다.”

바람을 쐬다니. 어디로?

이젠 뭔가를 한다고 하면 말리고 싶고, 안했으면 싶습니다.     


복학생중 한 형이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과대표들이 말이지.”

음, 뭔가 준비한 거네요.     


“캠프파이어를 준비했거든. 돈도 미리 냈고. 안할 수 없잖아.”

돈을 냈다고? 엥?     


이곳 현지 이벤트업체가 설치한 캠프파이어 이벤트라고 합니다.

말은 거창한 것 같은데.

근데 좀더 캐물으니, 동네 펜션 사장님들중에 소싯적에 밴드하셨던 분이 갖다주는 거라네요.

뭐를 갖다줘? 하고 물으니.

캠프파이어와 노래방 앰프 설치를 해주고 용돈 벌이하는 거지 뭐, 합니다.

또 뭔가 불안하죠.     


어쨌든 그걸 소개받고 미리 계약한 모양인데, 계약금을 선지급했다니, 안할 수는 없는 거라 모두들 과대표가 이끄는 데로 나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으슥한 공터에, 캠프파이어는 그냥 드럼통이고, 널빤지 부실한 단상 무대에, 창고에서 꺼낸 마을 회관용 노래방 앰프가 구비되어있었던 게 이벤트의 실체였습니다.


원효대사께서 말씀하셨죠. 일체유심조 라고.

모든 건 마음 먹기에 따라 달려있습니다.     

그러니까 저것도.

이건 이벤트다 하면 이벤트고.

이건 그냥 동네 공터 고철 창고다 하면 창고구나, 하고 생각해주시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마음 먹기에 따라 잘만 분위기를 내면, 고생했던 것 조금은 만회는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물론 이제 휘날레같은 어마무지한 마지막 불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지만요.


장작불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캠프파이어를 켰습니다.

벌건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타오르는 불을 보니 마음에 온기가 따스히 들어옵니다. 이상하죠.

과대표가 노래방 앰프로 경쾌한 배경 음악을 깔았습니다.

어라.

좋네요.

역시 음악이네요.

그렇게 불멍을 하며 경쾌한 음악을 듣고있으려니 마음 한켠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캠프파이어를 중심으로 우리는 둥글게 둘러서서 손을 잡고 돌았습니다.

부실한 단상 무대는 피해서. 밟으면 무너질 거니까.

노래방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bgm에 따라 노래도 불렀고요.

사랑이니, 편지니, 이별이니, 우정이니 하는 테마의 노래를 두런두런 불렀습니다.

청춘의 캠프파이어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네요.     


여기까지는 좋았다는 얘기를 저는 또 왜 할까요.

눈치 채셨죠. 이젠.     


그 다음이 나빴다는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겁나 나빴죠.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요.


이번엔 대체 무슨 일이.     


“스벌. 사랑 좋아하시네.”

“카하. 여기 사랑 타령 하시는 분들이 또 계셨어.”

“크악! 퉤! 누군 남녀가 짝짝꿍 좋겠어. 니들만 노냐. 우리들도 함 놀아보자고.”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들.

그들은 이 동네 양아치들입니다.

요컨대 쓰레기들.     


열댓명의 쓰레기들이 갑자기 난입을 하더니, 뭐 말할 틈도 주지않고 중앙의 캠프파이어를 발로 뻥 찹니다.

드럼통이 “텅텅텅” 나뒹굴고 불꽃이 펑 튑니다.


어디선가 소주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고요.

“쨍그렁!”

“어, 쓰벌.”


연이어 들리는 여학생들의 비명소리.

“꺄아악!!”

“엄마!!”     


이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만류고, 뭐고 할 틈도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이렇게 망조가 돼버린 거죠.   

  

그 다음은 대충 어떤 분위기로 흘러갔을까요.

거기서 쓰레기분들과 어울려 캠프파이어 불멍을 하며 훌쩍이면서 사랑 노래를 불렀을까요.

설마요.

당연 아니겠죠.      

복학생형들이 그들에게 부리나케 달려가 옆차기를 날린 건 또 결단코 아니고.

“형님들,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시끄럽게 했죠.” 하면서 사력을 다해 달래셨죠. 싹싹 빌며.

그동안 저희들은 여학생들을 끌고 숙소로 토꼈고요.

광속의 속도로 말이죠.     


충격이 컸는지, 여학생들은 얼굴이 하애져서 본인들 숙소로 쏘옥 들어가버렸고요.

우리들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고양이들처럼 복학생 형들을 옹기종기 기다렸고요.

한참이 돼도 오지 않았습니다.

별 일 없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요.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그야말로 떡이 된 인사불성의 복학생 형들이 돌아왔습니다.     


“끄억. 아니, 쪽수로 안되니까 싸움은 안되고. 술로 대적했지. 뭐. 할 수 없잖아. 우웨엑!”

그리고 뻗으셨습니다. 모두들. 장렬히.

그렇게 고대하던 여대와의 조인 MT를 오셨는데.    

 

그 뒤로 MT 일정은 차분히 쩜쩜쩜 되었습니다.

여기서 뭘 또 더할까요.

뭘 더 원하시나요.

그냥 조용히죠.    

 

이렇게요.

주무실 분은 조용히 주무시고.

E성향의 몇 명이 기분을 달래려고 한쪽에 모여 술잔을 돌리고.

여학생도 몇 명은 나와서 합석하고.

“기분 참 묘하네요. 오늘. 쓰벌.” 하는 대사 한줄 날려주고.

또 어떤 이는 출출한지 라면을 후르륵 끓여먹는 이도 있고요.

모두 알아서 자율적으로. 조용히.     


밤은 깊어갔고, 근처에서 들리던 하하호호 웃음소리도 잦아졌습니다.

저는 그런 밤의 풍경을 바라보았죠.

그래도 밝은 달이 떴습니다.

우린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요.

믿기지가 않습니다.

이게 과연 현실이란 게.


그러다.

달이 구름 사이를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흘러가는 광경을 보다보니, 문득 떠올려졌습니다.

잿빛 공대건물에서 우리를 노려보던 우리과 세명의 여학생 눈빛을 말이죠.     

이건 그녀들의 저주같은 걸까요.

전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건 미신입니다. 그런 따위 결코 없습니다.

현실에서 무슨.

그렇지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뿐.


다음날 새벽, 잠을 못이룬 저는 근처 강가를 나가보았습니다.

물안개를 보고 싶어서요. 여기까지 왔는데.

게다가 공짜니까요.

역시나 자욱한 물안개가 피어나는 강물의 모습을 보려는데, 누군가 저보다도 먼저 나와있지 않겠어요.

누군가 싶어, 보니.

전날 과대표와 오리배 대화를 나눴던 과동기네요.


그는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내내 서서 강물에 떠있는 오리배 한 척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오리배를 못탔군요.     


저는 그에게 다가가 말없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습니다.

그는 그런 저를 말끔히 바라보았고요.   

  

오리배를 너무 사랑하지마렴.


아침이 되자, 바로 짐을 꾸려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요.     


그 와중에 우리나 저 여학생들이나 서로 마주칠 새는 없었습니다.

여학생들은 여대 과대표가 이끄는대로 짐을 쌌고, 간단히 세면까지 마치고 일어섰습니다.

모두들 이곳을 당장 떠나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저희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누구랄 것도 없이 각자의 방법으로 서울을 향해 떠났습니다.

같이 타고온 버스가 없으니 알아서 가는 거죠. 슬프지만.

그러나 쿨하게.

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탈 사람은 타고, 기차를 타고 싶은 사람은 기차를 타는 거고. 이참에 자전거를 탈 사람은 자전거를 빌려서 타고 가는 거고. 걸어갈 사람은 국토종단도 할겸 멋있게 걸어가는 거고요.

각자 알아서 가고 싶은 로 말이죠.

우리가 같이 왔는지 그런 기억따위 어디에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 뒤로 그 여대와 다시 만나는 일 따윈 없었습니다.

그쪽도 저희와 엮이는 것 자체가 싫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MT에 돌아와 우리과 여학생 세명을 다시 만났습니다.

강의를 들어야 하니까요. 우리는 대학생이니까요.


그녀들은 우리들을 보자, "잘 갔다 왔니" 하는데.

뭐랄까, 시치미를 떼는 얼굴 같은데, 심증뿐이고요.

"야. 우리가 너네들 잘 갔다오라고 얼마나 기원했는데. 왜 이리 죽을상들이야. 뭔일 있었어." 하면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네요.


그녀들이 우리에게 저주를 내렸을까요.

설마요. 미신이죠.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냥 인생에 알 수 없는 일이 돼버린 겁니다.     

어떻게 일련의 불운들이 그날 한꺼번에 겹쳐진,

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제 인생의 미스테리인 겁니다.


학기가 끝나고 저는 군대에 들어가 그 여학생 세명과 다시 만날 일은 없었습니다.

휴가를 나와 학교를 찾았을 때 오다가다 보았을 수도 있을텐데 다시 만날 일은 없었네요.

사회에 진출하고도 마찬가지였고요.

두명은 대학원을 들어갔고, 다른 한명은 일찌감치 결혼을 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입니다.     


대신 제대를 하고 3학년에 복학을 해서 3월중순 즈음일 것입니다.

과대표가 강의실 앞으로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학생 형님들. 그리고 우리 현역 여러분. 이번 MT는 제가 아는 여대랑 조인을 할려고 하는데요.”   

  

전 당연히 외쳤습니다.

“안돼!!”          




그런데요.

실은 여기서 그날 있었던 일중 얘기 안한 것이 한가지 남았습니다.

뭘까요.


실은 이 글 제목과도 매우 관계된 일입니다.

어떤 일일지 한번 들어보실까요.     


MT 다음날 아침, 서울행은 각자 알아서 가기로 했다고 이미 말씀드렸죠.     

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까지 가는 군내버스를 타기로 했습니다.


군내 버스 정류장을 서둘러 나가보니 아침 일찍부터 줄이 길게 서있더라고요.

생각보다 서둘러 떠나는 이들이 꽤 있었죠.     


짧지않은 간격으로 군내버스가 정류장에 섰고, 전 줄을 지어 올라타서는 몇 개 없는 빈 자리 하나를 재빨리 앉았습니다.

당연히 피곤했거든요. 조금이라도 앉아서 가자 였습니다.

그런데 옆자리에 언제 왔는지 과동기가 있었습니다.

그애도 힘든지 이미 눈을 감고 있네요.


그 뒤로 좌석은 금세 찼고, 입석이라도 승객들이 계속 타는데,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습니다.

우리와 MT를 갔던 여대 과대표와 여학생들 몇이 눈에 들어온 거죠.

이쪽으로 뒷 승객에 밀려 걸어 들어오고 있었어요.


얼굴도 알고 MT도 같이 간 사인데, 아무리 버스라도 그냥 앉아있자니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리를 양보할까 싶어 엉덩이를 들어올리며 손을 들려는데.

저기요...     


그때입니다.

옆에 앉은 과동기가 나를 가만히, 그리고 확실히 잡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죠.


“그냥 앉아있어. 너가 일어나면 나까지 일어나야 하잖아. 우리 피곤하니까 그냥 자는 척 하자.” 라고요.


그리고 그는 눈을 스르르 다시 감았어요.     

저는 어정쩡히 일어섰다가 냉큼 앉았습니다.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눈을 감았죠.


눈을 감은 상태로도 바로 옆에 여대 과대표와 여학생들이 서있는 기척이 느껴졌어요.

그녀들이 우리를 빤히 내려다보는 것도 느껴졌고요.      


“출발합니다.”

기사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버스는 사람들로 채워져 만원이 됐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일어날까를 수십번 고민했지만, 밤잠을 설친 제 피로의 신경줄이 저를 칭칭 감아서 좌석에 붙잡아두었습니다.


일어나지마!

다시 만날 일도 없는데, 뭘. 하고요.


여전히 제 뺨에 그녀들의 시선이 송곳처럼 내리꽂히는 것을 느꼈지만요.    

 

기차역까지 십여분이 걸렸습니다.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는지 옆에 동기가 깨워서 일어날 정도였죠.


“어이. 일어나. 이김정. 역에 도착했어.”

깨어보니 기차역에 도착했고, 버스 안은 이미 사람들이 거진 내렸습니다.

여대 과대표와 여학생들 모습도 보이지 않았죠.


우리도 안심하고 슬슬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그때입니다.     


“아씨! 이거 뭐야!”

옆의 과동기의 갑작스런 외침입니다.

뭘까요.


뭔가 봤더니 엉덩이에 껌이 쫙 달라붙어있는 게 아닌가요.

얼마나 오지게 붙었는지 엉덩이와 좌석 사이에 껌이 고무줄처럼 치렁치렁 합니다. 침방울도 맺혀있는 것 같고.


으, 드러워.     


“아니, 어떤 자식이 자리에다가 껌을 붙여논거야. 아, 진짜.”

“어떡하냐. 너.”

“야. 이김정.”

“응? 왜?”

“너 엉덩이에도 껌이 붙었는데.”

“으웩!”


그걸 떼려니 씹은지 얼마되지 않는지 뜨끈뜨끈하고 손가락마다 찰지게 달라붙고, 침도 묻는 것 같고, 바지 천에도 점점 검게 변색이 돼가고. 으그그구.     


여자에게 무례하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십시오.


누군가 질겅질겅 씹은 저주의 껌이 엉덩이에 오지게 달라붙어서 떼어지질 않는 겁니다.

마치 정말 저주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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