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무거운 붓펜을 상무님은 아무렇지않게 들고 일필휘지로 자신의 이름을 조객록에 썼습니다.
이 양반.
숨막힐 정도의 솜씨네요.
이야.
날아갈 듯 글씨가 멋드러진 게 승천하는 용의 모습 같았습니다. 추사 김정희체군요. 카하!
저렇게 잘 쓰시는 분 처음 봤습니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조문객들도 우연히 보더니 “와아” 하고 침음성이 낮게 흘러나옵니다.
어쩜 저리 잘 쓰시지. 상무는 괜히 다는 게 아니구나.
다음은 팀장님.
이 양반도.
자세가 전혀 주눅들지 않네요.
입을 한일자로 꾸욱 다물고 “꾹꾹” 뚝심있게 쓰십니다.
이햐.
이건 뭐, 한석봉체 빼박입니다. 명불허전.
한석봉 엄마가 떡을 좀 썰었다죠.
실은 팀장님 어머님도 떡집을 하셨다는데, 연관이 아예 없다고도 볼 수 없겠네요.
자식 교육은 환경인가 봅니다.
그 다음 저는 당연히 패스.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또 만나요.
왜냐고요. 전 쩌리니까요.
쩌리란 주변을 맴도는 인물. 엑스트라 라는 거죠.
전문 용어로 좆밥입니다.
“이제 빈소로.”
제가 손으로 가리킵니다.
“잠시만.”
거래선 과장이 그런 내 팔을 잡았습니다. 야무지게.
턱으로 조객록을 쓱 가리킵니다.
에이, 어딜 그냥 가시려고, 하는 눈빛입니다.
전 눈으로 말합니다.
“저 좆밥인데요.”
그랬더니 과장이 눈으로 말합니다.
“상사 두분께서 저리 잘 쓰시는데, 솜씨 한번 보여주셔야지. 그냥 가시기는.”
다짜고짜 붓펜을 손에 쥐어줍니다.
마동석 붓펜을.
허억!
휘청휘청.
손이 휘청대는 건 처음 보네요.
이게 생각보다 정말 무겁습니다.
안에 철심이라도 박았나.
주위를 재빨리 스캔합니다.
옆에선 팀장님이 “빨리 하자” 눈치를 줍니다.
상무님은 막 구두를 벗으려는 참이고요.
제가 늦어지면, 꽈당 엎어질 수도 있겠더라고요.
고로 기다리게 할 수 없는 겁니다.
게다가 저 상무님 심기를 거슬렸다가는 내일 회사 가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아무 생각도 안했습니다.
무슨 관운장의 청룡언월도 같은 커다란 붓펜을 쥐어주고, 버티기도 힘든데.
여기다 이름을 쓰라니.
정말 에라 모르겠다, 였습니다.
째려보는 팀장님, 뒤에 선 상무님, 거래선 과장님, 그리고 그 옆에 또다른 거래선 직원이 이제 또 얼마나 잘 쓸까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습니다.
뒷차례를 기다리는 조문객들이 점점 몰려 제 주위를 둘러싸고, 저런 어르신들의 부하이니, 또 어떤 명필 무공을 보일지 기대 만땅으로 구경들 합니다.
추사 김정희체, 한석봉체, 그 다음은 뭐가 또 튀어나올지 정말 모두가 숨을 죽입니다.
저도 참 기대가 되네요.
“휘저적! 휘저저적!”
일필휘지.
뭐가 나왔을까요.
음.
낙서죠.
그냥 뭐, 낙서입니다.
독자 여러분. 대체 뭐가 나올지 기대하신 건가요.
지금까지 설명한 게 그건데.
그냥 제대로 낙서를 했다고 봐야죠. 이건, 뭐.
제가 봐도 못알아볼 정도니.
분명 제 이름 ‘이김정’을 쓴 건데.
일단.
사태를 모르는 모두가 갸우뚱합니다.
이게 낙서인가, 추상화인가, 뭐시기인가.
저분들 입장에선 그렇겠죠.
앞선 두분의 명필 여파가 남아들있으니.
설마 하는 거죠.
그래서.
혹시나 하고, 거래선 과장이 일동 대표로 제게 묻습니다.
“이건 대체...”
뭐냐고요.
굳이 알고싶다면 말씀은 해드리지요.
“중국 5대 서체중 하나로, 한나라의 초서체입니다. 중국의 간체자가 여기서 유래되었지요. 붓의 움직임을 빠르게 하여 장초의 파책마저 없애고, 그 경계를 없애어, 고인께서 훨훨 날아올라 좋은 곳으로 가시라는 뜻입니다. 중국의 장욱, 일본의 료칸이 대가이온데, 미천한 제가 부족한 솜씨를 부린 게 아닌가 민망할 따름이옵니다.”
카하. 말 한번 잘 한다.
“초, 초서체. 좋은 곳으로 가시라는. 오호!”
거래선 과장이 그걸 들고 눈이 알전구처럼 커져서 주위에 보여주며 미소 한가득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거, 래니까.
그제서야 사방에서도 탄성이 흘러나옵니다.
“오호!! 이햐!”
“저것이 초서체래. 이햐. 중국 5대 뭐시기라는데.”
“향교에서 수학하셨나보네. 고인과 어떤 사이신가. 어험. 나도 함 봄세.”
“큼큼.”
상무님이 조문하잡니다.
참 말 주변 없으신 양반일세.
조금 더 즐기면 안되나.
뭐, 어떻게 됐든, 그날, 상무님, 팀장님께선 저 같은 부하를 둬서 기분이 참 좋아지셨을 겁니다.
장례식장 조문객 분위기도 괜찮았고요.
그럼 됐지요. 뭐.
다음날 상무님이 특별히 저를 불러 박카스 한병을 주시더군요.
“이건?”
“그냥 마셔.”
참, 말주변 없으신 양반일세.
글씨도 어정쩡하게 써선 안먹힙니다.
제대로 못써야 이게 통하는 거죠.
물론 입도 잘 털어야 하고.
그렇다고 딱히 거짓말한 건 아닙니다.
글씨의 경계를 없애서 고인께서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랬던 저의 마음은 정말로 진심이었으니까요.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추사 김정희선생님의 글씨에 대해 동시대 서화가인 유최진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저도 글씨를 잘 쓰는 법에 구속받지 않습니다.
물론 너무 구속받지 않아서 탈이지만요.
제목에 대한 답 나갑니다.
시도 그렇습니다. 잘 쓰는 방법이 있긴 할 겁니다. 방법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그렇지만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진심으로 시를 쓰면 어쨌든 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릇.
인생을 사는 것도 매한가지이겠죠. 잘 사는 방법이야 있긴 하겠죠. 근데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진심으로 인생을 살면 저마다의 인생이 되는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