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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프랜 Oct 19. 2024

내 그릇의 크기와 모양과 재질

어떻게 세상 모든 사람의 그릇이 신축성이겠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나는 '잘 못하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워서 번아웃을 겪었던 것 같다.

이전에는 나의 어떤 요소가 단점이란 걸 견딜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래. 그게 거기선 단점이긴 했지.' 하고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나도 결국 나니까, 앞으로는 단점을 가진 채로 존재해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을 찾고 싶어졌다.

내 콤플렉스를 마주하고, 그걸 딱히 뜯어고치는 게 아니라 그저 받아들이고, 내 모습 그대로 자연스럽게 있어도 콤플렉스가 아니게 될 '조금 더 편안한 우물'로 옮겨 앉는 것.

그곳이 내 갭이어의 도착점이 아닐까 생각한 오늘.

- 2023년 5월 19일 일기에서



구독자님께 쓰는 열여섯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문프랜입니다.

오늘도 무탈하게 지내고 계시나요?


지난 편지에서 '세상에 정해진 절대는 없다!'라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내 기준으로 선택하자는 이야기를 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하나 남을 거예요.


'그럼 수많은 선택지 중에 뭘 골라야 해? 내 기준이 대체 뭔데?'


갭이어를 보내며 저도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평생 갭이어 상태로 살 수 (있다면야 너무 좋겠지만...) 없으니 결국 가까운 미래에 일터로 돌아가야 할 텐데,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첫 발을 떼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거든요.


번아웃과 무기력에서 회복하는 것에만 집중했던 시간을 지나, 이제 본격적으로 공백기 이후를 모색할 타이밍이 되니 갈피를 잡기 어려웠어요.


그렇게 머릿속이 소란하던 23년 초여름. 제게 어느 '사건' 하나가 일어납니다. 


바로, 유튜브에서 이 12분짜리 영상을 본 일이에요.


출처 | 유튜브 '톱밥꼰주'


아마 많이들 아실 것 같은 유튜버 '원지'님의 영상이에요. 저는 <지구마불 세계여행>이 방영되던 23년 봄에야 원지님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뒤늦게 원지님의 매력에 빠져 본계정인 '원지의하루'를 정주행 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부계정인 '톱밥꼰주'까지 탐독하다가 이 영상에 다다랐습니다.


유튜브에서 영상 하나 본 게 무슨 사건씩이나 되냐고요? 제게는 감히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어요. 이 영상이 갭이어를 마무리하고 지금의 프리랜서로 방향을 잡는 것에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거든요.


어떤 내용인지 아래에 요약해 볼게요. 하지만 그렇게 긴 영상이 아니니, 되도록이면 꼭 재생 버튼을 눌러서 직접 보시길 추천해요!



Q. 일단 경험을 많이 하라고들 하지만 도대체 무슨 경험을 해야 할까?

1. 한 우물은 옛날 말. 우물 여러 개 찔러봐야만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찔러보기 전에 최소한의 카테고리를 정할 필요는 있다. 산에 있는 우물인지 바다에 있는 우물인지 강 옆에 있는 우물인지.

2. 카테고리를 정하려면 나를 알아야 한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용납하지 못하는 것 등등 스케치북에 죄다 적어보자.

3. 그중에 좋아하는 것의 공통점을 찾고 그쪽으로 카테고리를 좁혀서 관련 경험을 여러 개 찌르고 우물을 파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그릇의 크기와 모양과 재질'을 알게 된다.

4.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꼭 찌르지 않고 슬쩍 들춰만 보더라도 그 일에 드는 공수와 과정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5. 자존감은 내가 뭘 잘할 때 올라가는 게 아니라, 내 콤플렉스를 정면으로 보고 인정할 때 비로소 바닥을 치고 올라간다.



그동안 제 편지를 읽으며 눈치채셨을 수도 있는데, 저는 성장욕구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에요. 오히려 현재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훨씬 더 커요.


그래서 흔히 자기계발 콘텐츠에서 말하는 '무조건 경험을 많이 해라' '성장해야 한다'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같은 메시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이나 영상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외면하곤 합니다. 내가 그렇게 못하고 안 할 걸 알기 때문에 일종의 죄책감이 들거든요.


그런데, 그런 제게도 원지님의 영상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왔어요. 그냥 덮어놓고 많이 경험하라는 게 아니라 '경험을 위한 사전 과정'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었거든요. 덕분에 막연함이 줄어들고 나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원지님 말씀대로 해봤습니다! (두둥)


우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태블릿에 죄다 적어봤어요. 위 사진이 제가 실제로 적었던 모습인데요. 한눈에 보기 어려울 것 같아 아래에 다시 정리해봤습니다.



좋아하는 것

글쓰기, 영화/드라마/뭐든 보고 나면 감상평 쓰기, 바이닐 모으고 듣기, 뜨개질, 사진 찍고 보정하기, 필름카메라 찍기, 영상 찍기보다는 편집하기, 포토티켓 만들기, 엽서/포스터/굿즈 등 모으기, 모은 엽서를 조합해서 공간 꾸미기, 요리하기, 요리한 것 사진 찍기, 설거지하기, 수납정리하기, 누워있기, 집에 있기, 익숙한 공간과 환경, 여행 계획 세우기, 고궁


싫어하는 것

낯선 사람과 대화하기, 낯선 환경, 숫자, 데이터, 매일 출퇴근하기, 지나친 관심, 분리된 시공간적 여유가 없는 것, 지나치게 활동적인 것, 사람 많은 곳, 힙(?)한 곳, 갑자기 선을 넘어서 다가오는 사람, 무례한 질문



언뜻 보면 그냥 서로 다른 키워드의 나열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신기하게도 공통점이 어렴풋이 떠올랐어요.


'좋아하는 것'의 키워드를 비슷한 성격끼리 묶어서 같은 색으로 표시해 볼게요.



좋아하는 것

글쓰기, 영화/드라마/뭐든 보고 나면 감상평 쓰기, 바이닐 모으고 듣기, 뜨개질, 사진 찍고 보정하기, 필름카메라 찍기, 영상 찍기보다는 편집하기, 포토티켓 만들기, 엽서/포스터/굿즈 등 모으기, 모은 엽서를 조합해서 공간 꾸미기, 요리하기, 요리한 것 사진 찍기, 설거지하기, 수납정리하기, 누워있기, 집에 있기, 익숙한 공간과 환경, 여행 계획 세우기, 고궁



빨간색으로 표시한 키워드를 보면 글쓰기부터 요리까지 꽤 다양하죠. 이게 어떻게 같은 카테고리가 될 수 있냐고요? 저는 결국 하나의 공통점이 이것들을 전부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말이 되는'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


머릿속에 엉켜있는 생각을 꺼내서 문장으로 표현하기(글쓰기), 영화를 보고 나서 두서없이 떠오른 감상을 정리하기(감상평 쓰기), 한 줄짜리 선에 불과한 실을 가지고 면 혹은 입체를 만들기(뜨개질), 어설픈 사진을 가공해서 그럴싸하게 만들기(사진 찍고 보정하기), 각각의 재료에 불과했던 것을 한 끼 식사로 만들기(요리하기), 뒤섞여있던 물건을 가지런히 재배치하기(수납정리하기)... 


이렇게 보니 서로 다른 키워드지만 성격은 정말 비슷하죠. 즉, 저는 질서가 없던 것들을 일정한 기준으로 정리하고 조합하고 재구성해서 결과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잘해요. 이걸 한 단어로 표현하면 결국은 '편집'이고요.


나머지 키워드도 살펴볼까요? 보라색으로 표시한 것은 취미와 취향의 영역으로, 저는 물성이 있고 약간의 아날로그 감성이 있는 것을 좋아해요. 트렌디하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건 별로 없더라고요. 그리고 노란색으로 표시한 것은 뼛속까지 집순이인 제 성향이 반영된 키워드들이고요.


싫어하는 것 리스트도 같은 방식으로 묶어봤습니다. 그러고 나니 최종적으로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었어요.



좋아하는 것

만들고 편집하기

되도록 혼자 일하기

집처럼 독립적인 환경


싫어하는 것

숫자와 데이터 다루기

인력 매니징하기

회사처럼 긴밀한 환경



정리를 하고 보니, 이게 바로 원지님이 말씀하신 '내 우물의 카테고리'구나 싶었어요.


되도록 집에서 혼자 무엇이든 편집하고 만드는 일이 제 우물인 반면, 사람을 끊임없이 만나야 한다거나 숫자와 데이터를 깊게 다루는 종류의 일은 제 우물이 아니에요.


자연스럽게, 전 직장에서 콘텐츠를 만들고 나서 '업로드 버튼'을 누를 때(2화 참고)가 왜 그렇게 좋았는지 알게 되었어요. 높은 밀도로 협업하고 사람을 뽑고 매니징해야 했던 시기에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도요. 결국 내 우물이냐 아니냐의 문제였던 거죠.


내 우물인 곳과 우물이 아닌 곳을 알게 된다는 건 곧 나의 장단점과 가능성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여기에서 오늘 편지의 제목이 나옵니다. 원지님이 말씀하신, 내 그릇의 크기와 모양과 재질!


상상해 보건대 도전의식과 성장욕구가 큰 사람의 그릇은 아마도 입구가 넓으며 작은 자극에도 금방 쭉 늘어나는 유연한 재질이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제 그릇은 그렇지 않아요. 작고 좁고 재질도 유연하지 않죠.


출처 | Unsplash (Brooke Lark)


이해를 돕기 위해 인터넷에서 그릇 사진을 좀 찾아봤는데요. 제 그릇은 위의 사진 오른쪽 아래쯤에 있는 아담한 간장 종지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


이전에는, 그러니까 원지님의 영상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유난히 작으면서 쓸데없이 견고한 제 그릇이 모자라게만 보였어요. 너는 그릇이 그것밖에 안되냐고 다그치는 분위기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아서 더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세상 모든 사람의 그릇이 신축성이겠어요?


그리고 사실 지금 제 그릇의 크기와 모양과 재질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아니에요. 내심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해요. 애초에 내 그릇이 그렇게 크거나 유연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니 '오, 그럼 나는 그릇이 깨지거나 넘치지 않는 선에서만 최선을 다하면 되겠구나.' 싶어졌거든요.


아주 작은 간장종지만 한, 찻잔만 한 그릇이더라도 뭐 어때요. 그 안에서 나름대로 맛있는 간장 한 숟갈, 차 한 잔 담아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인생 괜찮죠. 아담하니 제법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니 그대로 살아도 되지 않겠어요?


무엇보다, 내 그릇은 이런 크기에 이런 모양이고 이런 재질이라는 걸 알게 되니 다음에 할 일이 명확해졌습니다. 갭이어 이후의 방향을 찾기 위해 그릇을 억지로 넓히기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그릇 안에서 조금 더 탐색해 보기로 정했어요. 회사 생활을 할 때 훨씬 즐거움을 느꼈던 우물에 더 가까운 일을 하기로요. 그리고 그게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 글 콘텐츠를 쓰고 편집하는 프리랜스 콘텐츠 에디터예요.


갭이어 이전에는 그릇을 넓히지 못하는 내가 싫었고 내가 못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번아웃을 겪었지만 '아, 나 이거 못하는구나.' '내 우물과 그릇이 아니었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편해졌어요. 자존감은 콤플렉스를 직면했을 때 바닥을 치고 올라간다는 원지님의 말씀이 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어차피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되고, 내 삶의 방식은 그쪽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나니 내 안에서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만큼으로 목표치가 재설정되었거든요. 그리고 그게 곧 자존감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사실 이번 편지는 저의 열정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지라 어떻게 읽으셨을지 조금 걱정도 되는데요.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더 노력하자는 메시지가 세상엔 이미 가득하니, 저 한 명쯤은 내 우물과 그릇에 머물러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철없게 느껴졌더라도 제가 이런 사람인 건 어쩔 수 없죠 뭐! 헤헤.


그럼 이번 편지는 여기서 이만 줄일게요.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작고 아늑한 그릇 안에서,

프랜 드림.




추신.

구독자님의 '우물'은 어디인가요?
구독자님의 그릇은 어떤 크기와 모양과 재질을 가지고 있나요?


제 우물과 그릇에 대해서는 오늘 실컷 이야기했으니, 구독자님의 우물과 그릇은 어떤지 궁금해요. 


혹시 아직 잘 모르겠다면 속는 셈 치고 오늘 제가 소개해드린 원지님의 방법을 한번 시도해 보세요. 그리고 댓글 혹은 구독자 익명 방명록에도 꼭 올려주세요! 구독자님의 답장을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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