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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Nov 30. 2017

솔로몬의 성전터에서 지혜를 구하다...

이스라엘 성지순례-예루살렘

예루살렘의 중심은 단연 ‘성전산(Temple Mount)’이다. 예루살렘 여행사진에서 성전산의 골든돔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상할 것이다. 이 유명한 성전산이 성전언덕이라 불리는게 더 정확한 것은 이곳이 언덕처럼 그다지 높지않기 때문이다. 이 야트막한 성전산 위에 다윗왕의 아들이자 지혜의 왕 솔로몬은 거대한 성전을 지었다. 선민이자 유일신을 믿은 유대 민족국가의 첫 성전이었고 최고의 이 성전은 구약성서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대로 크고 화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거룩한 성전에 ‘계약의 궤’를 안치한 것이다. 날개를 멋지게 펼친 두 천사가 마주보는 형상이 새겨진 이 ‘계약의 궤’는 이 솔로몬 성전의 가장 중요하고 깊은 곳에 안치되었다. 유대인들은 이곳을 ‘최고로 성스러운 곳(지성소. the Holy of Holies)’이라고 불렀다. 이 지성소엔 사제들 중에서도 오직 뽑힌 당번사제만이 들어갈수 있었고 그것도 특별한 날에만 들어갔다. 이 성전 건립을 위해 솔로몬 왕은 멀리 레바논에서 유명한 삼목을 자파 항구를 통해 수입해 가져왔고 큰 라임스톤 돌을 깍아 성전을 세웠다. 이 성전은 유대교의 중심, 모든 유대인들의 중심이었다. 지리적, 문화적, 종교적 중심이었기에 유대민족의 전부라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유대민족의 전부였던 성전이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기원전 586년 파괴되어 내려앉았다. 이 성전파괴는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에 대한 자존심과 유일신을 믿는 그들의 자부심에 엄청난 상처를 안겨줬다. 사실, 성전파괴는 그들의 전부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전능하신 하느님 야훼의 침묵에 대한 불평, 그리고 바빌론 유수의 고난이 들이 닥쳤다. 이 바빌론 유수 ‘전과 후’의 유대교와 유대인은 전혀 다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금 유대교(주다이즘.Judaism)의 형태는 사실 바빌론 유수를 거치면서 새로 태어난 새 종교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그리고 야곱의 하느님이 그들에게서 사라지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즉, 성전 건물이 파괴되었다고 유대인 가슴속의 야훼신앙이 파괴된 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더욱 그들을 강건하게 만들었다. 페르시아 제국 사이러스 왕의 칙령으로 기원전 약 516년경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힘을 모아 다시 성전을 재건했다. 느헤미야가 앞장섰다. 솔로몬의 성전보다 훨씬 작고 초라했지만 성전은 성전이었고 그들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즉 4대 복음에 나오는 헤롯대왕 시대인 BC 19년에 솔로몬의 제 1성전에 이은 제2 성전이 다시 솔로몬의 성전처럼 크고 화려하게 확장 증축되었다. 복음서의 일화로 헤롯왕은 그렇게 좋은 이미지를 지니고 있지 못하지만 그는 나름대로의 지략을 가진 통치자였다. 로마제국의 영향에서 살아남을 지략도 가졌다. 그보다 더, 그는 건축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그는 지금도 남아있는 이스라엘 곳곳의 고대 건축물에 흔적을 남겼다. 예루살렘에선 통곡의 벽이라 일컫는 이 성전의 서쪽 벽에 헤롯왕 시대 성전벽이 남아있어 눈으로 직접 볼수있고(그위의 벽은 오토만 터키시대의 벽) 그 벽의 사각형 라임스톤 벽돌에다 자신의 흔적도 남겨놓았다. 지금 통곡의 벽은 헤롯 왕의 성전 서쪽벽의 일부분일 뿐이다. 여기서 작은 서쪽부분(Little Western Wall)이라 불리는 곳은 유대인들이 일컫는 가장 성스러운 지성소(the Holy of Holies) 자리에서 가까우며 이는 곧 하느님의 현존을 일컫는 셰키나(Shechina)의 장소이다.



그 후, 로마제국을 이어 비잔틴 제국과 이어 따라 온 아랍 이슬람의 영향에 들어간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예언자 마호멧이 메카에서 하룻밤만에 천사들(혹은 날개가진 말)에 의해 실려서 이 예루살렘 솔로몬의 성전 자리로 날아왔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가 날아앉고 승천한 바위가 이 성전산에 있기에 이슬람에서 메카 다음으로 신성한 성지로 여긴다. 더구나, 구약성서 대부분을 받아들이는 이슬람에선 예루살렘이 성지인 것은 당연한 건지 모른다. 바로 예언자 마호멧이 승천한 그 자리엔 지금 ‘알 악사’ 모스크가 세워졌고 황금돔(Golden Dome)도 세워졌다. 유대교 솔로몬의 성전자리에 이슬람의 두 모스크가 서 있는 까닭이다.



이 성전산은 또 예언자 마호멧과 솔로몬 왕을 훨씬 거슬러 올라가 구약성서 아득한 시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외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명에 의해 희생시키려 했던 장소, 즉 ‘모리아 산’이라 불렸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지금도 이사악을 희생하려했던 그 터는 남아 있다. 아브라함은 결국 천사의 전갈로 아들대신 숲에 걸린 어린양을 희생물로 바쳤다. 그래서 이 솔로몬의 성전에 유대인들은 절기마다 어린양을 희생물로 바쳤다. 그리고 가톨릭 미사때면 어김없이 ‘천주의 어린양’이라고 부르는 이 어린양은 그리스도를 지칭함이며 원뜻 어린양은 이곳 성전산 또는 모리아 산의 어린 희생양이 그 기원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이 성전에 바치던 어린양의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갚음(대속)되었고 더 이상 어린양의 희생은 필요없음을 ‘한번으로 모두 다(Once and for all)’라는 신학용어로 설명한다. 이제는 미사성제로 남아 그 희생과 구원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 가톨릭을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묻히셨으며 또 부활하신 예루살렘의 성묘성당(The Holy Sepulchre)이 성전산 대신에 최고의 성지가 되었다. 이 성묘성당은 이곳 성전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이 세 아브라함계 종교들의 성지인 예루살렘이 항상 논쟁과 폭력으로 얼룩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1929년 성전산 한쪽인 통곡의 벽 아래에서 유혈참사가 일어났는데 이 좁은 장소에서 무려 133명이 죽었고 339명의 유대인들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후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과 그 이후 동 예루살렘은 요르단이 점령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시 모든 유대인은 성전산 출입이 약 16년 동안 금지되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구역조차 유대인들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승리하며 서안(West Bank)지구를 점령할때 이 동 예루살렘도 같이 점령획득함으로 이스라엘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지금 통곡의 벽이  있는 곳은 한때 모로코 구역이었으나 점령군 이스라엘이 불도저로 밀어버렸다고 하며 통곡의 벽에 기도하러 오는 순례객들을 위한 넓은 광장이 되었다. 지금 밖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이지만 그 분쟁의 불씨는 아직도 훨훨 타고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처럼. 예루살렘의 뜻이 ‘평화의 도시’임을 다시 상기하며, 평화가 절실히 필요한 이곳이기에 평화가 오길 염원했다. 이곳에 평화가 없으면 세상의 평화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밝은 대낮이 어두워졌다.  


다시 "샬롬(평화)"


https://brunch.co.kr/@london/138

https://brunch.co.kr/@london/85

https://brunch.co.kr/@london/67


성전산 남쪽벽. 알-악사 모스크가 보인다. 왼편이 통곡의 벽이다. 오른편 멀리 보이는 곳이 올리브 산이다. 이 중간에 키드론 계곡이 있다.

올리브 산쪽, 도미누스 플레빗(Dominus Flevit. 주님의 눈물 성당) 성당에서 본 성전산. 골든돔이 중앙에 뚜렷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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