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런던 율리시즈 Sep 07. 2019

조국 : 도리언 그레이의 나르시시즘

'자기집착에서 오는 판단력 마비'- 런던 율리시즈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란 무엇일까?

'자기애착'으로 번역되는 이 나르시시즘은 도덕과 양심이란 얼음같이 찬 정화수로 깨워 치유해야 할 심각한 '질병(disease)'이다."
*****
1.

아일랜드와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명석한 두뇌에 최고 학벌 그런데다 세속적 성공도 누렸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그는 여러 희곡을 써서 영국 무대에 올렸고 대부분 성공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당대 영국 상류층 사교계에서 최고로 유명하고 인기있는 인사였다. 그런 그가 딱 한편의 소설을 썼는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이란 소설이다(단편은 여럿있다). 이 소설은 미(Beauty), 즉 예술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탐미주의(aestheticism)적 소설이라 불리기도 한다. 19세기 세기말적 현상에다 경직된 영국 빅토리아 시대 말기라 시대반항적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성적인 암시와 주제도 은밀히 이 소설에 잠복되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젊고 잘생긴 '도리언 그레이'다. 그는 누구하나 부럽지 않고, 세상 사람들 모두 그를 우러러 보는 가장 잘 나가는 사교계의 '댄디(Dandy)'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매력남이고 셀럽이며 '소셜 미디어 스타'일 것이다.

이 매력남인 주인공의 캐릭터 분석을 통해 예술과 미에 대한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적 성찰을 찾아볼 수 있고 또한 나르시시즘의 본질도 엿볼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서문에서 도리언 그레이 부류의 사람들은 그저 외적이고 육체적인 젊고 잘생긴 외모를 중시 흉내내나 사실 그 육체적 아름다움 이상의 가치는 별 없다고 한다. 다른 말로,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것에 신경쓰다보니 개인의 인격이나 도덕 그리고 내면의 아름다움인 '인간적 성숙'은 외려 도외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육체적 아름다움(Physical Beauty)과 내면적 아름다움(Inner Beauty)을 서로 교차시킨다. 한쪽에만 기울면 나르시시즘적 현상이 올수 있다.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는 나르시시즘에 기울어진 이들이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은, 특히 도리언 그레이 같은 부류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또는  '선한 행동과 나쁜 행동'의 구별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이런 도덕적 선악의 구별을 할 수 없는 '판단력 마비'가 이들에게 온다는 것이다.

'난 이뻐'를 넘어서

'난 항상 최고야'와 '내 말이 항상 맞아'가 그들 삶의 일상이다.  

그래서 도리언 그레이의 최대 관심사는 이 '자기교만'이 되어버린 잘생긴 외모와 젊음을 영원토록 유지하는 것이다. 이에, 자기애착, 나르시시즘이 서서히 싹트고 자라기 시작한다. 문제는 어떤 수(계략)를 써서라도 이 싱싱한 아름다움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것이고 세상사람들의 부러움을 한껏받는 최상의 위치에서 절대 내려오지 않겠다는 왕고집의 멘탈리티를 강화시킨다. 여기서 '자신을 비우겠다'는 그럴듯하고 자주 들어 본 그런 진부한 변명도 없고 '짐을 다 내려 놓겠다'는 변명도 없다.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이런 나르시시즘적인 행동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없고 그의 자기애착적 삶에서 남에 대한 배려란 있을 수도 없으며 오직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기만을 기대한다.

이 소설에서 이런 나르시즘적 도리안을 부채질하고 타락시키는 것은 헨리 경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나르시시즘의 진짜 문제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 즉 '자기집착(Self-obsession)'에서 오는 것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자기집착'에 중독된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시스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것도 심각하게 말이다. 이 자기집착의 나르시시즘은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유지시키려는 끊임없는 욕망을 계속해서 부채질해댄다. 이 욕망의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게 하려면 부채질이 필요한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음흉한 헨리 경(Lord Henry)이 “세상의 진짜 신비는 가시적이지 비가시적인 것이 아니다(the true mystery of the world is the visible, not the invisible.)” 라고 했을 때 도리언 그레이는 이미 어떤 충만한 자기교만의 감정이 자신의 영혼을 흠뻑 적심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의 영혼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변해간다. 외면은 젊고 아름답지만 내면은 서서히 흉측한 몰골로 변해가는 것이다. 젊고 아름다움에 대한 도리언 그레이의 집착(obsession)은 곧 허영(Vanity)이었다. 이 허영의 본질이 '공(Empty)'이기에 자연히 늙어감과 성숙함에 대한 두려움(Fear)이 도리언 그레이의 아름다운 외면의 마스크 안쪽, 즉 그의 내면을 가득 채운다. 여기서 영혼을 사탄에게 팔아버린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같은 거래도 였보인다. 이 공허한 허영은 도리언 그레이의 영혼, 즉 내면의 아름다움이 자기집착인 무명(無明)에 의해 흉측하게 변하게 되며 결국 자신의 파멸은 물론이고 애꿎은 사람들을 죽이는 원인도 된다.

내면적 아름다움, 즉 영혼의 순수함을 잃은 도리언 그레이는 사랑했던 배우 '시빌'의 죽음에 위로의 말을 건네는 화가이며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 바질(Basil)에게 말한다.  

“엎질러진 물입니다. 다 지나간 일이라구요(what is done is done. What is past is past.)”

이 말에서 이미 그의 내면엔 '도덕적 판단력 마비'가 왔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다 다락방에 숨겨놓은 그의 초상화가 흉측한 몰골로 변해감에도 외면적인 그의 아름다움은 그대로인 이 '이중성'에 스스로 전율까지 느낀다. 그래서, 이 소설은 '스릴러'로도 사실 손색이 없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처럼 인간의 나르시시즘을 탐색하는 소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영원한 젊음을 위해 자신의 순결한 영혼마저 팽개쳐 버린 도리안 그레이를 통해 이러한 자기집착과 허영의 본성을 세밀히 성찰한다. 특히 오스카 와일드는 당대 빅토리아 시대의 이중성과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허영심에 대한 자신의 관찰을 도리안 그레이를 통해 이 소설에 녹여내며 '어떤 형태의 나르시시즘'도 결국 '자기집착'에 근원을 둔 '허영'이며 궁극적으로 인간을 부패로 이끄는 원인이라 말하고 있는 듯하다.


2.
어찌보면 한창 논란의 중심에 선 '조국' 교수의 경우도 비슷하다(물론 미디어에 보도된 뉴스는 왜곡된 진실도 많을 것이다.). 어쨋든, 한국 사회에서 그의 배경인 화려한 학벌, 모두가 우르러고 선망하는 교수라는 신분, 그리고 부유한 집안, 이 모두를 가진 그는 어찌보면 도리안 그레이와도 비슷하다. 거기에다 논란 전까지 툭툭 소셜미디어에 던진 '사회정의', '경제정의'  그리고 '개혁'이니 하는 멋지고 화려한 말들은 대중을 사로잡고 현혹시킬수 있는 매력이 있으며 그렇기에 인기몰이를 한 것은 도리안 그레이의 나르시시즘적이고 자기집착(Self-obsession)적 행동과 다름없다.

그래서, 조국 교수 자신도 이런 상황에서 나르시시즘(자기애착.Narcissism)이란 질병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은 이런 그를 부러워하고 우러러도 보았을 것이며 질투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도리언 그레이를 순진하게 추종한 바질(Basil)같은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나르시시즘이란 자기집착에 근원을 둔 허영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과 남들을 은밀히 비교해 자신이 비교우위임을 확인증명하며 또 남들 스스로 이런 자신을 칭찬하며 치켜 올려줬기에 '자기도취'란 화려해보이지만 부질없는 허영심에 '중독'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분별이 어려운 '판단력마비'가 그의 '내면의 삶'을 혹시 지배한 건 아니었을까?

이 자기집착에 중독되어 아내와 딸도 이 중독성 강한 허영을 감염시키며 이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허영을 계속 보존유지하기 위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라는 '잔꾀와 편법'을 동원했지 않았을까?

도리언 그레이가 했던 말처럼 아무런 가책없이,
“엎질러진 물입니다. 다 지나간 일이라구요(what is done is done. What is past is past.)” 라고 스스로 위로의 말을 하며 개인적 사회적 책임감을 묻어버린게 아니었을까?

도리언 그레이가 자신의 이중성에서 전율을 느낀 것처럼 도덕과 양심의 판단력 마비가 그에게 오지 않았을까?

안타깝다. 언혼매체의 보도가 반만 사실이더라도...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을 다시 한번 더 찬찬히 읽어보아야 겠다.


*****

https://brunch.co.kr/@london/292

https://brunch.co.kr/@london/287

https://brunch.co.kr/@london/28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