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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Sep 01. 2019

유시민: 참을 수 없는 이중성의 공허함

아방가르드에서 주류-기득권으로의 여행기

유시민. 한겨레 신문

아방가르드에서 기득권으로의 여행


'유시민 작가'는 이제 한국인이면 대부분이 아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사실이다. 자신은 자신의 타이틀로 이름 뒤에 '작가'로 불리길 원한다고 어디에서 읽었다. 가끔 '논객 유시민'으로 멋있게 나오는 경우도 보았다. 예상컨데, 자신이 들으면 기분도 짜릿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이곳저곳서 소리치며 의기충천해 총총 정의를 위해 나서는 지런함, 다른 한편으론 낄데나 안낄데나 나서 설쳐 가볍다는 부정적 의견도 함께 공존하는, '호와 불-호'로 뚜렷이 이미지가 갈리는 사람중 한명이기도 하다.

십수년 전 그의 책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재미있게 읽었다. 아마 초판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부산의 형님집 어느 방 책장에 꽃혀 있을 것이다. 읽은 지 몇년 후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걸 알았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인식할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자책으로 최신 출판된(아마 올해 2019년 판) 그의 '유럽 도시 기행 1'을 읽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내용 자체가 지금 잘 기억나지 않지만(베트남 통킹만 사건만 빼고) 그땐 참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당시는 상황이 상황이라 내용이 참신했단 기억도 있다. 그러나 최근 출판한 그의 여행기는 (미안하지만) '수준이하'였다. 내용자체도 그렇고 글도 그랬다. 군데 군데 틀리는 내용이나 정보도 그랬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박물관이나 건축물을 대면하고 감상하는 것도 피상적이고 단편적이며 아리러니하게도 이 여행기를 통해 그의 얕은 지식수준까지 드러내고야 말았다. 지식소매상의 임무는 '위키피디아' 식 지식이었나 의문이 일었다. 즉, 책의 많은 부분이 위키피디아(www.wikipedia.org)식 정보에다 직접 내용을 번역했는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그 도시의 일반 정보들도 혼자 아느냥 실었고 또 인터넷상 특정한 장소의 관광안내서를 막바로 카피한 듯한 내용들로 의심되는 것들도 드문드문 있었다. 말인즉, 가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적인 관광지 정보를 적어놓아 놀랍게 만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래서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내리 발랄한 참신함이 여긴 없었다고 할까.

하여튼, 그의 이 두 책사이, 즉 몇십년 간격 사이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 난 잘 알지 못했다. 가끔 그는 신문지상에 여러 번 이름이 나왔고, 가끔 논란의 중심에 섰고, 자주 (여기선 방송을 못봤지만) 방송 프로그램 여기저기 쏘다니며 연예인 같은 일상을 보내며 분주하다고 들었다. 글솜씨만큼 말솜씨도 있다고 들었기에 잔재주가 많은 사람이구나 생각도 했다. 거기에다 정치판에서 국회의원과 장관이란 감투도 썼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곳저곳 기웃하고 자기 목소리 열심히 키우며 사는 분이라 여겼다. 유럽도시기행을 읽어보니 가끔 그는 그의 이력을 많이는 아니지만 슬쩍슬쩍 여행기에 집어 넣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 그가 자주 이용했고 또 독자에게까지 권하는 검색엔진으로 그를 찾아보니 과연 이 유시민이란 작자(작가가 아닌)야 말로 프랑스 지성이자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이론에 딱 들어 맞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예술문화장(Cultural Field)과 미술시장(Art Market)의 다이내믹한 상황을 분석한 부르디외는 예술세계와 예술가들이 그들의 분야(장. Field. 불어론 Champ)인 문화장(Cultural Field)안에서 어떻게 서로 경쟁(투쟁)하며 주도권을 잡고 뺏는지를, 그가 대중화시킨 용어들, 특히 장(Field), 아비투스(Habitus), 그리고 캐피탈(Capital. 자본)을 이용해서 명쾌하게 분석한다. 내용인즉, 부르디외는 이 예술장을 분석하며  '현실(contemporary. 동시대. 오늘날)'을 주목하는데 이 현실은 과거로부터 미래로의 연장선으로서 '투쟁의 장'으로 보았다. 그리고 예술장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반복되는 메카니즘이 작동함을 설명하는 그는, 이 예술문화 분야에서 과거 한때 새롭고 창조적이고 참신해서 '혁명적인 아방가르드(revolutionary avant-garde)'로 불렸던 예술가나 예술운동이 이제 오늘날(contemporary) 사회에서 인정받는 예술이나 예술사조로 자리매김되는 과정을 친찬히 살펴 분석했다. 또 성공한 아방가르드 예술이 기성예술로 또 미래엔 예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서 그 진행의 동력은 아방가르드로 불리는 또다른 예술가나 예술사조가 오늘날(현시대) 권력을 쥔 주류-기득권 예술사조나 예술가들에 반기를 들고 도전하며 적폐주장을 외치며 투쟁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헤겔의 정반합처럼 보이지만 다르고, 투쟁이란 용어사용으로 보아 마르크스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하여튼, 이 진행과정중의 경쟁을 투쟁(경쟁)으로 본 부르디외는, 특히  '주류(mainstream)' 또는 권력이 있는 중앙(Centre)으로 진입하려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항쟁의 장으로 예술장을 본 것이다. 그래서 컨템포러리 예술(contemporary art) 분석은 과거와 미래로의 연장선에서 주류에 남기 의한 투쟁(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의 '연장의 장'이다. 그래서 과거 한때는 '이게 예술이야' 하며 멸시받고 천대받던 예술가가 이젠 똑같은 어투로 신세대이자 비주류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이것도 예술이라고?'하며 비판 폄훼한다. 즉, 투쟁의 결과로 주류에 진입해 남는다는 것은 바로 권력(Power)를 가진다는 것이며 이 권력은 기득권 권력으로써 이 권위와 권력을 비판하며 떠오르는 새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로부터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기득권유지를 위해 이들은 이들이 가진 기득권 권력을 이용하여 폄훼나 깎아내리는 행위도 불사하고 얼굴 두꺼운 짓도 거리낌없이 한다. 이 기득권 권력도 부르디외는 '캐피탈(Capital)'이란 용어로 요령있게 설명한다.

부르디외는 특히 이 '예술장에서의 투쟁방식'을 아주 중요하게 보았는데 이는 다른 분야로 확대 접목해 응용할 수 있으며 예술장의 간접적인 사회적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또 모든 장(Field. 분야)을 분석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름은 없지만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아방가르드 예술가에서 '주류 장'안으로의 진입에 성공한다면 캐피탈, 즉 자본으로 상징되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 연예인이라면 주류로의 진입은 '인기'로 성사되고 스포츠 선수라면 '게임 성적'이 그들의 몸값인 연봉을 좌우하는 것이다. '데미안 허스트'가 무명의 아티스트에서 YBA의 선구적 예술가로, 가히 혁명적으로 상어를 몽탕 반으로 잘라 전시한 패기발랄한, 한편으론 '이것도 예술이야, 하하하' 하며 조롱과 멸시를 동시에 받았던 아방가르드 예술가에서 영국과 세계 미술계 주류로 진입성공함으로 그의 작품가격은 하늘높은 줄 모르고 뛰었다. 즉, 그의 작품가격이 그의 주류진입 성공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젠 그의 이름만 갖다 붙이고 사인만 하면 몇백만 달러의 가치로 환산되어 버린다. 그런만큼, '아방가르드-주류 권력장-또 다른 아방가르드의 도전'이란 예술장 안에서의 다이내믹한 순환은 계속된다. 이를 부르디외는 투쟁 또는 경쟁(Struggle)으로 보았던 것이다.

유시민 작가도 한때 학생운동으로 당시 서슬퍼런 독재정치에 대항하는 아방가르드였다. 이름 그대로 전위부대의 전사였던 그였다. 그러다 민주화의 진행으로 그의 이런 아방가르드 이력은 자신에겐 큰 가산점으로 작용했고 학벌사회인 한국에서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그의 서울대 학벌도 암암리에 사회적 캐피탈(Social Capital)로 그의 이런 이력에다 덤으로 얹어 주었다. 이는 문화 캐피탈(Cultural Capital)처럼, 그의 이런 사회정치 캐피탈로 비가시적이지만 상징적 캐피탈(Symbolic Capital)로 환원되고 맞교환되어 그의 이력에 도움이 된 것이다. 즉, '셀럽'들이 유명세를 타고서 자기 이름을 내건 식당을 내거나 상품을 판매하는 것과 똑같다. 유시민 작가는 이 사회정치적 캐피탈로 그의 책이나 방송활동을 해서 그의 사회적 캐피탈을 높였다. 즉, 이름값을 올려놓은 것이다. 거기에다 한때 국회의원이었으며 장관의 이력까지 보태져 그의 캐피탈은 한층 더 가치가 높아지게 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내걸고 책을 쓰든가 하면 책 내용뿐 아니라 그의 이름을 보고 책을 사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이름값'이란 이야기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진중권'이나 '변희재' 같은 '튀어보기'식으로 란의 중심에 끼어들어 자신의 이름값, 즉 캐피탈을 올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는 성향이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모두 똑같다. 이에 부르디외의 이론에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어쨌든, 유시민은 이제 아방가르드에서 주류로 진입했으므로 좋든 싫든 기득권자가 되었다. 즉,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사람들이 주목하고, 신문이 보도해 주고 그에게 의견을 물으며, 또 방송에도 출연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제 '대한민국 장'에서 유명인(셀럽)이 되었고(뒷 부분에서 터키에서의 에피소드로 연결) 그의 고료와 인세 그리고 강의료는 아방가르드 시대때보다 훨씬 더 높아졌을 것이다. 한편, 그는 부르디외의 예술장 이론처럼 주류권에 있으면서 또다시 떠오르는 아방가르드를 맞아 싸움을 준비해야하는 것이다. 자신의 기득권 유지와 보존을 위해… 이는 자신이 정치에서 은퇴를 했든 안했든, 자신이 동의하든 안하든, 현실이 되어버렸다. 비록 그가 주로 다루는 사회와 정치쪽은 예술쪽과 다르지만 그의 유럽 도시 기행에서조차 (정치에 관한 책이 아님에도) 그의 사회적 캐피탈을 소비하는 기득권 향유를 슬쩍슬쩍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최근 '조국 사태'에 대한 그의 의견을 보면 분명히 부르디외의 이론이 여지없이 들어맞는다는 걸 확인한다. 이제 그는 기득권의 입장에 서서 주어진 자신의 캐피탈을 맘껏 사용해 세계와 정치와 사회를 해석한다. 그래서 현실(contemporary)의 또다른 신세대 아방가르드를 내리누르려 자신의 사회적 캐피탈로 권력을 행사한다. 여기서 캐피탈은 무기되며  권력(power)이란 정치적 권력만이 아닌 사회적 캐피탈을 이용한 권력이다. 자신의 사회적 이름값캐피탈로 새 아방가르드를 보고 '그것도 예술이야?' 하는 기득권 논리와 추론으로  제압하려는 한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마스크 쓴 대학생 촛불참여자에 대한 그의 말에서 보듯 그의 판단력은 이제 기득권의 판단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럼, 최근이라 보여지는 그의 '유럽 도시 기행 1'에서 그의 기득권 향유와 냄새한번 독한 기득권이란 브랜드의 향수를 슬쩍 그리고 교묘하게  뿌려대는 예를 찾아보자. 이 유럽 도시 여행기에서 터키 이스탄불의 '스타벅스 베벡'이란 예쁜 커피숍을 간 이야기가 나온다. 여행가이드와 대화를 나누면서 이곳이 터키 '셀럽'들이 많이 온다고 하는 사실을 알곤, 유시민이 '나도 한국에선 셀럽인데요' 하는 대화가 나온다(앞 부분의 셀럽을 참조). 이를 증명하기위해 에피소드 뒷부분에 커피숍에 앉아 있던 한국 남자 둘 앞을 그는 의도적으로 서성대 (자신이 유명인이라) 그들이 자신을 알아볼 것이라는 장난을 겸한 시도를 한다. 그 둘이 한국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자신을 못알아보자 자신이 셀럽이란 걸 가이드에게 확인시키는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다.

물론 별것 아닌 에피소드지만 유시민은 왜 이걸 기꺼이 자기 여행기에 끼워 넣을 생각을 했을까? 그냥 웃기자고 한 얘기겠고 신변잡기식 여행기지만, 왜 자신의 지위, 즉 자신이 '셀럽'임을 무의식중 또는 의도적으로 (처음엔 문외한인 터키 가이드에게, 나중엔 한국 독자들에게), 드러내고 싶었을까? 글 자체를 보면 굳이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랑한 것은 분명 아니지만(실패로 끝나서?) 별 의미없어 보이고 애들 장난같은 이 에피소드를 그의 여행기 공간을 굳이 할애하며  끼워넣었을까 생각했다. 우연한 대화중 나온 셀럽이란 단어와 자신을 막바로 연결시키는 유시민의 이런 모습을 보며 이 씁쓰레한 에피소드에서 바로 사회적 캐피탈인 얼굴 많이 알려진 셀럽이란 자신의 자화상을 무의식중 투영시킴을 알수 있다.

또 다른 이스탄불편 어느 부분엔 호텔직원이 무엇하느냐는 질문이 들어오자 글쓰는 작가라고 대답했는데 나중에 다시 호텔로 돌아왔을때 이 직원이 자신의 이름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고 한다(불법 아닌가? 손님 이름으로…). 그래서 혹시나 (특히 위키피디아를 언급) 자신의 정치경력 특히 장관감투까지 쓴 자신의 이력이 들통날까 걱정한다. 그렇다면 '그건 전직'이라하면 될 걸 뭘 이런것까지 "혹시 거짓말한게 들통날까" 라며 궁색한 변명 끼워놓아 책의 공간을 수다스럽게 채울까? 외국의 어느 이름없는 호텔직원까지도 자신의 전직 감투, 그것도 겨우 일년남짓 했던 장관의 이력을 가지고 '대영제국의 부질없는 영광(그의 책속에 나온다)'처럼 혹시 자신의 장관 감투의 거룩한 영광을 은연중 알아 채 주길 기대했을까? 아님, 한때 장관이었던 자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춘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교묘히 알리려 했을까? 자꾸 심중이 한쪽으로 굳는다. 중요한 건  유시민 작가는 이 사회적 캐피탈을 은연중 의식해 소비하며 자신을 특정위치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속물(snob)이라고 할까?어쨋든, 속물의 자화상이 여기 어런어런하다.

유시민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굳이 드러내려예는 또다른 에피소드로 읽어 낼수 있다. 이는 연줄(networking)을 이용해 자신을 슬쩍 올리며 위치지우는 것이다. , '난, 이런 사람이야'를 각인시킨다. 로마편에서 우연히 만난 대학 선배를 언급하며 그가 그저 가톨릭 신부라는 정보만으로도 충분할 것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시 '밀착 수행한' J 신부라고 친절히 소개한다. 알만한 독자들은 다 아는 사람을 굳이 이렇게 교묘히 언급한다. 깔깔깔… 이 유럽도시 여행지에서 우연히 선배를 만나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선배가 누구며 무엇을 했는지는 사실 '불필요한 군더더기 정보'이고 독자는 알 필요도 없다. 이를 굳이 교황을 '밀착 수행한 사'이란 말을 붙이는 유시민의 탁월한 단어선택 그리고 이런 그의 심리를 읽어 낼 필요가 있다. 이건 비약인지 모르지만, 여기서 굳이 필요없는 교황이란 단어는 고딕체를 써서 강세표시를 붙이지 않더라도 이 문장을 읽는 독자들은 이미 강세로 읽혀지기에 자신과 교황을 은연중에 연결하려는 심리를 여기서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이 사람과 연결되(알아)…' 하는 자랑이 이 문장에 숨어있다.

더구나 더 놀라운 것은 유시민 자신이 이 책에서 노르웨이계 미국인 경제학자겸 사회학자인 베블렌(Thorstein Veblen)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가 언급한 베블렌의 책 '여가계층의 이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 1899)'에서 나온 유명한 문구 '과시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를 유시민 자신의 에피소드로 이 책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유시민은 이 책에서 각 도시 음식을, 길거리 음식포함, 자주 얘기하는데, 로마편에서 한 레스토랑을 언급하며 '식기나 플레이팅 스타일이 수수했고 맛도 고급스럽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바로 청빈의 삶을 산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씨시를 다녀온 뒤였고 청빈의 삶에 감명도 받은 듯했다. 그래서 한턱 "쏜다"는 레스토랑에서 이 음식과 레스토랑 평가는 이루어졌다. 바로 베블렌이 말하는 '베블렌  이펙트( Veblen Effects)'로도 볼 수 있고 또 '과시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 형태로 자신의 취향(Taste)을 독자들에게 은연중 인식시키며 자신을 고급취향으로 슬쩍 올려놓는 것이다. 하류층이 상류층 소비형태를 따라하려는 행위와 또 어떤 것을 소비하느냐에 따라 상하계급이 구분된다는 베블렌의 이론은 여기에 딱 들어 맞는다. 취향이 고급이냐 아님 저질이냐는 소비자의 소비형태로 판단되고 이는 사회계급으로 구분되며 또 설명된다. 유시민 작가가 맛의 고급을 말하고 레스토랑 인테리어를 얘기할 때 그의 선택과 취향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며 아방가르드였던 자가 주류권인 기득권으로의 편입과 향유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즉, 기득권의 소비행태를 흉내내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자의 편에 서서 또 약자인 피해자 편에 서서 강대국의 문화재와 예술품 강탈에 울분을 토하는 이 책 내용속의 "그" 유시민과 고급 취향 "이" 유시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화난 듯 써내려 간, 파르테논의 슬픈 역사유물 약탈이라든가,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의 강탈의 역사비판에서도 보듯 옛 아방그가르드 시절 정의(Justice)란 향수와 논리는 계속 이용해 써먹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론 기득권 혜택으로 여유로운 상류층 계급의 여유와 허영을 스스로 흉내내며(부르디외와 베블렌의 '흉내내기'와 '따라하기') 레스토랑의 스타일과 음식 맛의 취향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 한 곳엔 '이중심리(Double Standard)'의 쩍쩍 갈라진 깊은 간격의 공허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것도 바로 가난한 삶의 모범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얘기 바로 다음 문장에 이 에피소드가 나온다. 심리적으로 보면 이런 상태엔 항상 공허한 심연의 간격이 존재한다. 한때 아방가르드 전사였다가 지금의 주류사회의 캐피탈을 가진 기득권 사이의 간격은 의외로 이렇게 잠복된 듯 숨어 있다 나타나며 본질은 허무이다.

한마디로, 그는 이미 자신의 이름값으로 사회적 캐피탈을 가진 채 다시금 도전해오는 신세대 아방가르드 전사들을 비판하고 이제 '흥, 그게 예술이라구!' 빈정되는 기득권과 주류권 인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조국 사태'에서도 나서대며 '위법'이 있으면 사퇴하지 지금까지 위반한 법이 없다는 논리도 이런 '틀(이론. 또는 배경인 콘텍스트)'에서 해석해보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법과 위법'사이만을 맴맴 따지다가 '윤리와 도덕성'은 무시하고, 그렇기에  비가시적으로 행해지는 폭력엔 침묵한다. 지금까지 쌓아 올려온 캐피탈을 굳게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윤리와 도덕은 잊고 법이란 테두리를 넘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기득권의 보편적 멘탈리티가 그에게 보인다. '이거 위법 아니야…'하며 이제 우리 사회에서 주류 기득권 권력을 향유하는 유시민은 텍스트(Text)를 해석하기 위해 콘텍스트(Context)를 과장해석해서 오버하는 말을 쉽게 해버린다. 그의 가벼운 입도 여기 한 몫한다. 역사와 문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묵직한 유럽의 도시들은 가벼운 입으론 설명이 안된다. 유럽도시 여행기에서처럼 텍스트인 현재 도시를 여행하기 위해 한편으로 치우친 일차원적 단면인 자신만의 콘텍스트(도시의 역사, 특히 정치사 등)를 덮어 씌우다 보니 텍스트(도시)의 원래 풍미를 없애버리는 우를 범했다. 콘텍스트란 조미료를 너무 첨가해 원재료 맛을 없애버린 것과 같다. 그 도시의 박물관이나 갤러리의 작품들 고유의 맛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이건 일반화의 폭력이고 예술작품 감상의 바바리안이다. 단적인 예로, 약탈과 강탈의 역사적 콘텍스트만을 강조하다보니 수많은 예술품을 품은 루브르 등 문화재의 엄청난 텍스트를 그는 도외시했다. 동시에, 루브르 안엔 유시민 자신도 인정한 프랑스의 유례없는 창조적 파워로 이루어 낸 수많은 걸작품들을 도외시한 우를 범했으며 그래서 여행 길라잡이라 선전한 자신의 여행기 독자들을 엉뚱한 길로 인도해 버렸다. 이제 구글맵을 이용해 찾아가 보라는 억지를 부리는 것같다. 그래서 도시가 스스로 말을 하듯 하라는 그의 여행기 첫머리 충고가 머쓱해졌다. 아마 이 말은 영국 미술평론가였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 존 러스킨의 말을 빌려온 듯한데, 러스킨은 베니스를 여행하며 '건축스스로 말한다(a building should speak)' 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러스킨의 유명한 말을 살짝 바꾸어 표절을 피하며 유시민은 도시가 말하는 걸 들으려면 그 배경인 콘텍스트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 자신의 콘텍스트로 도시의 입에 재갈을 물려 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똑같은 이유로, 바티칸 대성당과 박물관도 권력욕에 집착한 교황들의 역사적 콘텍스트로만 읽어 대성당 건축과 역사, 시스틴 채플과 천장화 그리고 라파엘로 방의 예술적 숨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그가 스스로 일으킨 소음으로 해서 예술적 종교적 숨소리를 듣지 못했다. 유시민 작가는 다각도의 콘텍스트가 아닌 경직되고 일차원적인 콘텍스트로 그의 두 귀와 두 눈을 막아버렸기에 진정한 도시의 살아 숨쉬는 숨소리와 바로 눈 앞에서 살아 꿈틀대는 텍스트를 아쉽게도 놓쳐버렸다. 사실, 이런 좁은 식견은 기득권 주류가 된 사람들이 아주 쉽게 걸리는 '고질병'이다. 아방가르드 시절 열어두었던 귀와 눈을 유명세, 이름값, 자본, 명예 등을 포괄하는 후에 획득한 사회적 캐피탈로 스스로를 꽁꽁 닫아 버린 것이다. 그래서 유시민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이 그렇게도 비판하는 '수꼴'들처럼 되어가는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러면서, (솔직히 말해) 유시민도 이런데 잔재주도 없는 한국당 등등 우파들은 도대체 어떨까?


*****

[유시민 작가의 '유럽도시기행 1편'에 대해]


*유시민 작가는 글 잘쓰기로 알려졌고 또 글쓰기 강의와 책까지 냈다고 알려졌는데 왜 이 여행기는 그 수준을 못따라 가는지 궁금했다. 책 전체가 그랬다. 가끔 그 도시 관광지의 정보도 틀리게 썼는데, 예를 들면 바티칸 대성당(St. Peter's Basilica)을 들어가려면 바티칸 박물관을 거쳐야하며 그래서 돈을 내고 입장하게끔 만들어 놓았다고 썼다. 그래서 이를 바티칸의 이탈리아식 자본주의라 단정지었다. 하지만, 대성당은 사실 무료로 바로 입장이 허용되며 박물관과 시스틴 채플을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다. 다만, 워낙 사람들이 몰려들고 또 중요한 건물이라 요즘은 테러에 대비해 공항에서 검색하듯 검색대를 통과해야만 한다. 또, 여기도 한정없이 긴 줄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물론 종교도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것처럼 유시민 작가 자신도 이 사회적 캐피탈(이름값) 땜에 출판사로부터 여행기를 쓰라는 청탁도 받지 않았는가? 이 이름값이란 사회적 캐피탈은 경제적 캐피탈로 막바로 교환된다. 그래서, 유시민은 이 경제적 캐피탈인 출판사 인세비로 한턱 "쏜다"고 자신이 직접 거리낌없이 책에 적어 놓지 않았던가? 이로보아 그는 그렇게 쫀쫀하진(stingy) 않은가 보다. 그런 한편, 아테네편에선 몇년 전 그리스의 경제난을 언급하며 그리스 사람들의 느긋함을 얘기한다. 악착같이 돈벌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관광객들에게 고대의 의상인 튜닉이나 고대 신발인 가죽 샌들 대여점을 오픈하거나 문화 해설자을 고용할 것을 제안하며 농담반 진담반 경제사정도 엉망인데 돈벌 궁리를 제안한다. 로마편에선 바티칸의 이탈리아식 자본주의를 칼같이 빈정대더니 아테네에선 이젠 똑같은 장사속 자본주의의를 그리스에 충고한다. 이중적이다.

또 한가지는 어디서 들었는지 이 책에서 유시민은 프랑스 파리는 14세기 전까지 이름없는 변방도시였다고 단언한다.

그럴까?

파리는 이미 508년 프랑크 족 클로비스 왕에 의해 메로빙거 왕조(the Merovingian dynasty)의 도읍지로 정해졌고 그 뒤로 계속 이어졌다. 한 나라의 수도가 변방도시라 할 수 있을까? 예술의 변방도시? 12세기초인 1140년에서 1144년 사이엔 유럽최초의 고딕스타일인 '생 드니' 성당이 세워졌고 이 고딕성당 스타일은 유럽전체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유럽여행은 고딕성당여행이라 할 정도로 유럽 예술과 문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유시민이 언급한 노트르담 대성당도 고딕성당이며 생 드니 대성당 건축 20여년 후인 1166년경에 지워졌다.

그것도 아니면 학문과 지성의 변방도시? 생 드니 대성당 설립연도와 비슷한 시기인 1150년경부터 노트르담 대성당 부속학교로 출발한 유럽의 초기 대학중 하나인 '파리 대학(소르본이라 일컫는)'이 파리에 세워져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센 강변으로 모여 들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도 여기서,  예수회를 세운 이냐시오 성인도 여기서 공부했다. 프란스치스코회의 보아벤뚜라 성인도 여기서 아퀴나스 성인과 지성의 라이벌로 서로 경쟁했다. 이들은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이었다. 14세기 전이었다. 파리는 유럽의 지성들이 모인 중심지 역할을 그때 벌써 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 후 바다 건너 영국 학생과 교수들 주도로 옥스포드로 이 대학의 노하우를 전했다. 그래서 파리가 14세기 전엔 유럽의 변방도시란 말은 도대체 어디서 들었을까? 역사를 거꾸로 쓴 것인가? 아님, 거꾸로 읽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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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Pierre Bourdieu, The Rules of Art: Genesis and Structure of the Literary Field, trans. Susan Emanuel(Stanford, CA, 1996), p. 158.
-불어 출판: Les règles de l’art: Genèse et structure du champ littéraire (Paris, 1992).

-Thorstein Veblen: Conspicuous Consumption, 1902 at Fordham University's "Modern History Sour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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