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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카당스 Aug 31. 2024

연봉 2억 3천에도 돈이 모이지 않는 이유

런던의 살인적인 물가

조금은 자극적이고 민감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어쩌다 보니 운이 따라줘서, 마흔이 안된 나이에 연봉 135,000파운드, 오늘 기준으로 약 2억 3천의 연봉을 받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한국어로 번역해 보면 기업 신용위험 포트폴리오 매니저라는 일인데, 은행에서 하는 일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 보너스까지 합치면 세전 연봉으로 거의 3억 가까이 되는 셈. 자랑이냐고? 네. 자랑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결코 자랑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왜 이렇게 고액의 연봉을 받으면서도 결코 돈이 모이지 않는지 얘기해 볼 테니까.




정말 미쳐버린 세금


우선 세금부터 시작해 보자.


유럽의 세금은 악명 높기로 유명하다.


전에 살던 헝가리의 경우 소득세는 15%에 불과했지만, 각종 사회제도에 대한 사회보장세가 붙어 실질적인 세금은 35%에 달했다. 그때도 세금 때문에 피눈물을 흘렸는데, 그때를 그리워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 했다.


영국은 약 3만 8천 파운드까지는 20%의 세금을, 약 12만 5천 파운드까지 40%(!), 그 이후는 45%(!!)의 세금을 부과한다. 여기에 사회보장세까지 추가되고, 10만 파운드부터 12만 파운드까지는 세금 환급금이 줄어들면서 연봉이 올라도 월급이 오르지 않는 마의 구간까지 존재한다.


20%에 달하는 부가가치세까지 생각하면, 거의 연봉의 절반은 세금으로 뜯기는 셈이다.


게다가 보너스의 경우에도 보너스와 연봉을 합산한 세율을 부과하니, 연봉표를 볼 때와 월급 명세서를 볼 때의 기분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더 미쳐버린 주거비


다음으로 연봉을 갉아먹는 주된 주범은 영국에서 숨만 쉬어도 나가는 주거비 항목이다.


월세부터 살인적이다.


우리는 런던 교외(교외지역이다) 지역의 방 3개짜리 집에서 살고 있는데, 옆으로 집을 늘릴 수 없어 3층까지 올라가는, 전형적인 런던 교외지역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집의 월세가 한 달에 3000파운드, 한국 돈으로 약 5백만 원이다.


런던 시내로 들어가면 사정은 더 열악해진다.


시내 중심가에 살고 있는 지인의 경우, 방 두 개짜리 작은 집에 사는데 월세로 4500파운드, 약 760만 원을 내고 있다. 2000파운드 대로 내려가려면 방 사이즈를 두 개나 한 개로 줄이거나, 혹은 출퇴근이 2시간 가까이 걸리는 지역, 아니면 위험한 지역에 살아야만 한다.


그러나 월세는 시작에 불과하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 터진 이후로 유럽의 가스비와 전기세는 폭등했다. 물세 또한 만만치 않아서, 한 달에 이런 비용만 약 350파운드, 약 60만 원이 나간다.


우리 집은 새로 지은 집이라 사정이 좋은 편. 오래된 집들의 경우 한 달 백만 원은 우습게 나온다.


그러다 보니 겨울에도 히터를 틀지 못하고 옷을 껴입고 자거나, 에너지 효율이 비교적 좋은 전기난로 등을 사용하기 일쑤다. 현지인들은 비싼 연료비 때문에, 장작을 사다가 벽난로를 떼는 식으로 겨울을 난다고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월세로 사는데도 카운실(일종의 구와 같은 개념)에서 부과하는 카운실 텍스를 내야 한다. 쓰레기 수거라던가 도로 정비 등의 용도로 쓰이는 공공 세금인 셈. 이 비용도 한 달에 약 40만 원가량 한다.


정리해 보자.


평범한 3인 가족이 런던에서 숨만 쉬고 사는데, 약 6백만 원이 나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살인적인 생활비


다음으로는 살인적인 생활비가 월세와 세금으로 이미 탈탈 털려버린 은행 계좌를 공격한다.


먼저 교통비.


런던 시내에 살고 있다면 교통비가 훨씬 덜하겠지만, 교외지역에 사는 이들은 보통 기차로 출퇴근을 한다. 이 요금이 하루에 15파운드에 달한다. 한국 돈으로 약 2만 5천 원인 셈.


주 5일 출퇴근을 한다고 감안하면 이 돈만 약 50만 원이다. 거리가 멀어지면 기차값도 올라간다. 2시간 반 거리에 사는 다른 동료는 기차비만 왕복 40파운드 이상을 낸다고 한다.


다행히 런던은 하이브리드 근무가 정착이 되어서, 지금은 주 2회 출근을 하고 있다.


회사에서 주 2회를 주 3회로 늘리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는데, 직원들의 엄청난 반발 때문에 실패를 하고 말았다. 아마 이렇게 살인적인 교통비가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외식의 경우 런던 시내에서는 인당 15파운드 정도면 평범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다. 물론 샌드위치라던가 저렴한 식당을 가면 10파운드 이내로도 먹을 수 있다. 구내식당에서는 저렴한(?) 8파운드의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런던 시내 펍에서의 맥주 한잔은 약 5파운드. 약 8천 원이다. 그래서 그런지 펍에 가보면, 안주도 없이 맥주 한두 잔만 시키고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있는 영국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문화가 그런 게 아니라, 비싸서 그런 거다.


물론 웨더스푼(Weatherspoon) 같은 저렴한 펍도 존재한다. 물에 탄 듯 밍밍한 맥주 맛이 문제 이긴 하지만, 저렴한 가격 덕분에 늘 붐빈다.


물론 요즘에는 한국도 물가가 워낙 비싸져서, 영국의 외식 물가가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할 수는 없다. 얼마 전 다녀온 뉴욕에 비교하면 오히려 저렴한 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비싼 생활비와 세금 때문에, 한국에서처럼 자주 외식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한국에 비해 장바구니 물가가 비교적 저렴하다는 것이다.


특히 과일과 유제품은 한국에 비해 오히려 저렴한 편. 육류도 비싸지 않은 편이라, 약 100파운드 장을 보면 3인가족 기준 일주일 정도 먹을 수 있다. 우리 집은 한식을 고집하는 편이라 조금 더 나오는 편이지만, 만약 영국인들처럼 먹는다면 100파운드도 안 나왔을 것이다.


외노자라서 발생하는 비용


마지막으로 해외로 떠돌아다니는데 발생하는 불가피한 비용이 있다.


먼저 신용등급이 그것이다.


한 나라에 쭉 정착해 살면 신용등급을 착실하게 쌓을 수 있고, 그렇게 쌓은 신용등급을 통해 저렴한 비용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이자비용이 적은 것이다.


그러나 나라를 3번 옮기면서, 신용등급을 쌓을 수 있는 기회들이 날아가버렸다.


미국에서 간신히 쌓았던 신용등급은 헝가리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고, 런던에서도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만 했다. 덕분에 급하게 큰돈이 필요할 때 현금을 사용하거나, 훨씬 큰 비용을 지불하고 대출을 해야만 했다.


또한 나라를 옮기면서 기껏 모아 온 자산들을 처분해야 했다.


작게는 가구부터 크게는 자동차까지, 전부 파는 순간 손해가 확정되는 것 들이다. 운송비용이 만만치 않아 대부분 처분을 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큰 손해를 보게 되었던 것.


마지막으로 제도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발생하는 비용들이 있다.


한국이었으면 꼬박꼬박 챙겨 먹었을 연말정산이나 아이를 위한 제도 등에 대한 혜택을 받기가 어렵다. 또한 어떤 동네가 좋은지, 가성비가 좋은 식당은 어딘지 등을 알기가 어려워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한 번씩 한국에 남아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분명 남들처럼 아파트를 샀을 것이고, 부동산 가격 상승의 혜택을 크게 봤을 것이다. 아파트 가격이 폭등했을 때 집이 없는 사람들은 소위 "벼락거지"가 되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우리가 바로 벼락거지였던 것이다.




절망과 함께 시작하는 청산별곡도 마지막에는 희망찬 노래로 마무리된다. 내내 우는 소리를 했지만, 결국 나는 이곳에서 희망을 본다.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남들처럼 집도 없고, 아직 아이는 어리며, 비용은 줄어들 생각을 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희망을 보는 이유는, 나라를 옮기면서 커리어를 키워온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외에서 살고 일하면서 남들은 하지 못한 많은 경험들을 했다.


우리 아이의 경우 한국어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바이링구얼(Bilingual)이 되었고, 4개국에 살면서 자유롭고 창의적인 아이로 자랐다. 아내의 경우도 해외생활에 이제 완전히 정착한 모습이다.


어차피 인생은 한 번 아니겠는가. 모은 돈은 없지만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고, 힘들지 않게 일하면서 브런치 글을 쓰고 있으니 행복한 인생이기도 하다.


변화가 많았던 인생에 앞으로 또 어떤 변화들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오늘도 나는 희망을 노래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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