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건네는 손

-김장하러 갔다가 김치만 챙겨온 이야기

by 강효진

나에게 김장 김치는,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선물 꾸러미였다. 결혼 후 오랫동안 친정엄마가 챙겨주던 김장 김치가, 그리고 엄마가 뇌출혈로 치료받은 후로는 시어머니가 보내주는 커다란 택배 상자가 그랬다. 김칫국물이 새지 않게 몇 겹이고 꽁꽁 싸맨 어머니의 김치를 꺼내어 김치냉장고에 차곡차곡 넣고 나면, 내가 김장이라도 한 듯 뿌듯했다. 나는 그저, 겨우내 김치를 맛있게 먹으면 그뿐이었다.


"김치통 가지고 한 번 오너라.“


내 맛있는 겨울 루틴은 꼭 여기까지라는 걸, 어머니의 전화 한 통으로 깨달았다. 양가 어른들 가까이 이사를 했으니, 택배가 아니라 김치를 가지러 직접 가는 것이 당연했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멀리 산다는 핑계로 어머니 김치를 얄밉도록 얻어먹기만 했지만, 가까이 살면서도 그럴 수는 없다는 걸 내 최소한의 양심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 한 번도 김장을 해본 적 없던 나에게 어머니의 김치가 무거운 바윗덩어리처럼 얹혔다. 김장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더 솔직해지자. 나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이 김치를 먹으며 긴긴 겨울을 보내겠지. ©강효진


우연히 통화한 형님에게 이 속 좁은 걱정을 털어놓으니, 생각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김치 가지러 가지 마.“


어머니는 당신의 힘든 몸으로 여전히 큰일을 손수 하려고 하시니, 우리가 김치를 안 가져가야 그렇게 많은 김치를 담그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여든이 넘은 어머니가 김장을 그만하기를 바라는 형님의 말에 나는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의 한마디가 김장 노동을 피하고만 싶은 내 마음을 슬쩍 가려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편해질 핑계가 생겨 반가운 건 아닐까, 싶어 여전히 찔렸다.


김장하는 날이 다가올 즈음, 해마다 어머니를 돕던 형님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제는 정말 피할 수 없겠구나. 난감한 마음으로 체념하는 순간, 어머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홀로 앉아, 김치소를 만들고 절인 배춧잎마다 하나하나 양념을 버무리고 계실 어머니의 굽은 등과 거친 손이.


그래, 김장! 한번 해보자. 겁이 안 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어머니 곁에서 심부름이라도 열심히 하자고 결심했다. 이제껏 얻어먹기만 했던 며느리가 아주 작은 힘을 보탤 기회가 생긴 거라고 생각했다.


김장하는 날,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손이 느리고 일머리 없는 나를 데리고, 어머니가 제대로 김치를 담그실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나마 함께 도울 남편이 유일한 믿을 구석이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어머니 댁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집안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커다란 김장 그릇에 온갖 재료들로 어지러울 줄 알았던 부엌은, 양념 냄새가 배어있기는 해도 너무 말끔했다.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았다.


"우예 이리 일찍 왔노. 다 끝났다.“


일이 있다던 아주버님이 어머니와 함께 배추를 절이고, 새벽 일찍 양념까지 모두 버무린 뒤 조금 전에 돌아갔다는 것이다. 내가 크게 마음을 먹고서야 겨우 결심할 수 있었던 일을, 아주버님은 어머니 곁에서 말없이 해낸 것이었다. 어머니 목소리는 어려운 숙제를 모두 마친 아이처럼 홀가분하게 들렸다.


부엌 한쪽에는 커다란 밀폐용기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우리 몫의 김치였다. 잊지 말고 챙겨가라는 어머니 말씀을 듣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식탁 위에 놓인 양념통만 바라보았다. 막내며느리이자 딸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왔던 걸까. 어쩌면 그 마음들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건 아니었을까. 나는 그저 뜨끈한 전기장판에 앉아 남편과 함께 귤만 까먹고 있었다. 귤껍질이 내 마음처럼 자분자분 쌓여갔다.


"엄마요, 이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입시더."

남편의 목소리에 가만했던 거실 창으로 귤빛 햇살이 한 줌 더해졌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해물찜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어머니는 갓 담근 김치도 있고 밥도 금방 되니 집에서 먹자고 했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식당에 들어서니 바다 내음이 몰씬 밀려왔다. 어머니 앞접시에 매콤한 양념이 어우러진 낙지를 올려드리고, 새우 껍질을 까 드리면서 김장을 그만하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다.


"김장을 우째 안 하노. 다른 건 없어도 김치는 있어야지."

어머니가 망설임 없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할머니 김치가 제일 맛있다는 손주들도 있고."

손주들의 이름을 발음하던 어머니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


산수유 열매가 붉은 12월 ©강효진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겨울답지 않게 따뜻한 볕이 골목 구석구석 환히 스며들고 있었다. 커다란 김치통과 파김치, 그리고 어머니가 직접 기른 무, 배추에 시금치까지 트렁크에 싣고 나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김장을 꼭 하려는 어머니 마음이 이런 걸까. 자식들의 겨울을 든든히 채워주고 싶은 마음.


집에 돌아와 저녁상을 차렸다. 양념이 골고루 밴 김치 한 포기를 꺼내어 먹기 좋게 썰었다. 어머니 김치 특유의 감칠맛과 짠내가 뒤엉킨 젓갈 내음이 코끝에 닿았다. 쫄깃한 현미밥 한 술에 김치 한 조각을 올려 먹으니, 아삭한 김치의 매콤하고도 고소한 맛이 오래 입안을 감돌았다. 어머니의 투박하지만 섬세한 손과 아주버님의 부지런함이 만들어낸 맛이었다. 겨울 초입, 어두운 새벽을 조용히 깨우던 다정함의 맛.


설거지를 하고 나니 문득 김치냉장고가 눈에 들어왔다. 온갖 채소들과 김치가 차곡차곡 채워진 나의 곳간. 저 안에서 김치는 나날이 익어가겠지. 나는 그 김치를 조금씩 꺼내 먹으며, 긴 겨울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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