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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Oct 30. 2022

엄마로부터의 억압... "이제는 자유를 원해요."

인생의 장면들 (9)


“제가 원하는 거는....”     

푹 눌러쓴 야구모자 아래, 정연의 두 눈이 생각을 더듬듯 바쁘게 움직인다.     


“... 자유. 자유요.”      

한낮의 주말, 시내 한가운데 커피숍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말소리, 커피 잔이 스푼과 부딪히는 소리, 우유 스팀기가 연기를 내뿜는 소리. 잡다한 소음들 사이를, ‘자유’라고 말하는 정연의 명료한 말소리가 어둠 속 한 가닥 햇살처럼 뚫고 나온다.      


“자유... 그리고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 그게 제가 원하는 거 같아요. 그러면... 그렇게 되면 행복해질 것 같아요. 근데 아직 제가 그럴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유에 따라오는 책임을 질 마음의 준비가... 저는 그 책임이라는 게 무서운 사람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근데 그걸 극복할 수 있다면.... 그러면 저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난 한 시간여 동안 정연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정연이 말하는 '자유'란 엄마로부터의 자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연의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않았다. ‘이 집에서 태어난 게 저주’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엄마와 따로 산 지 오래 시간이 지났는데도. 직장을 잡고, 나이 서른을 넘기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데도. 엄마의 그림자는 아직 정연의 삶에 어른거린다.      


“엄마에게는 희망이 없었어요... 아빠 사업이 망하고 아빠가 가정을 거의 버렸거든요. 집에도 잘 안들어왔어요. 자꾸 이사를 갔는데, 집이 점점 집 같지가 않아졌어요. 한 때는 얇은 판자로 된 문 하나가 엄마랑 저를 지켜주는 전부인 집에서도 살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도 그 때 참 무섭고 힘들었을 것 같기는 해요. 그런 상황에 놓인 당시 엄마에게는... 저 밖에 희망이 없었겠구나.. 나라도 붙잡아야 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근데 그때 엄마가 보기에, 제가 꽤 똑똑해 보였나 봐요. 한글도 빨리 떼고, 현상에 대한 이해도 빠르고... 엄마는 제가 천재라고 생각했어요. 혹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야 살아나갈 구멍이 생기니까. 그래서 저를 자기의 희망으로... 그때의 삶을 벗어날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했던 게 아닌가... 근데 그 희망이 저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게 저에 대한, 아니 제 학업에 대한 집착이 돼버린 거죠...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부터 제 학업엔 집착하기 시작해서...”      


정연이 테이블 위에 놓인 물 잔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본다. 생각을 추스르나 보다. 아니,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지도. 정연과 나 사이의 공기가 무겁다. 나는 재촉하지 않는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무 테이블의 무늬들을 찬찬히 살피며, 정연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저를 철저하게 대상화했던 것 같아요. 채찍으로 때리거나 당근을 줘서 길들여야 하는 대상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가 저한테, ‘네 인생은 이제 끝이야’라고 했어요. 이제부터는 죽었다고 생각하래요. 그때부터 새벽 6시부터 학원에 가고 친구랑 놀지도 못하고... 그렇게 엄마가 하라는 대로 살았어요. 그런데도 엄마 눈에는 제가 차지 않았어요.”     


“성적이 잘 안 나와서요?”     

“아니요. 공부는 나름 잘했다고 생각해요. 근데 1등을 못할 때도 있었어요. 당연하잖아요. 근데 엄마에게는 1등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어요. 반에서 3등 정도 하는 게 못하는 게 아닌데... 그 정도 결과가 나오면 엄마는 저에게 소리를 질렀어요. 그리고 제가 오로지 공부만 생각하지 않는 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제가 중학교 때 영화 <타이타닉>이 개봉했는데, 친구들이 저한테 같이 보러 가자는 거예요. 재밌을 것 같아서 엄마한테, 엄마, 애들이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보러 가는데 나도 가고 싶어, 그랬더니... 엄마가 저한테 막 소리를 질렀어요. ‘너 미쳤어? 네가 제정신이야? 네가 어떻게 감히, 영화를 보러 간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아..." 


"그리고 더 어렸을 때는.. H.O.T가 인기가 많았고 저도 좋아했었는데... 애들은 H.O.T 보러 방송국도 가고 집 앞에도 가고 그러는데 저는 못 가잖아요. 엄마 때문에. 그래도 애들이 포스터 같은 거 얻으면 제 것도 챙겨주고 그랬어요. 그래서 하루는 그걸 집에 가져갔는데... 엄마가 보면 난리 나는 걸 아니까 책상 어디 안 보이는데 숨겨놨거든요. 근데 엄마가 그걸 어떻게 찾아서... 갈가리 찢더니... 또 소리를 막 질렀어요. 네가 어떻게 이런 걸 집에 가지고 올 수가 있느냐고, 네가 어떻게 이런 데 정신을 팔 수가 있느냐고. 너는 공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이 없는 애다, 너 같은 애한테 투자를 하는 내가 미친년이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는 엄마가 저한테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면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왜냐하면 엄마는 저를 한 번 혼내기 시작하면.... 정말 진이 빠지게 하루 종일 혼을 냈거든요. 해가 뜨고 밤이 될 때까지... 그러면 저는 엄마한테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막 애원하고 빌었어요. 그러다가 중학교 가서. 그때부터는 엄마에 대한 감정이 바뀌었어요.”     


“어떻게요?”     

“두려움에서, 분노로.”     

모자 아래 보이는 정연의 입술. 살짝 벌어진 그 입술에서 어떤, 억울함 같은 게 느껴진다.      

 

“제 아이는 절대 그런 삶을 살게 두지 않을 거예요. 1등만 외치며 경쟁을 부추기는 이 사회에 그대로 두었다가는, 공부를 잘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 못 받는 학교 시스템에 그냥 두었다가는.... 건강한 마음으로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그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으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처럼 방황하지 않고... 자기가 누군지, 자기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 그런 걸 알 수 있게 키우고 싶어요.”      


"... 정연씨는요? 아이의 인생 말고, 정연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요? 

"저는.... 자유롭게.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정연씨가 생각하는 자유가 뭔데요?”     


“...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혼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던 습성... 그게 아직 제 내면에 깊숙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안 그러려고 하는데, 남의 시선을 신경 안 쓰려고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남한테 끌려 다니고 있는 저를 발견할 때면.... 그 사람한테 미움받을까 봐 안 하고 싶은 걸 하고, 안 가고 싶은 데를 가고, 안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있는 저를 볼 때면... 저 자신한테 또 한 번 크게 실망해요. 그러지 않고 싶어요. 그런 것에서부터 자유롭고 싶어요. 이런 억압... 남들의 시선... 이런 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 ‘나’로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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