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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Oct 30. 2022

떠나고 싶은 이유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가족이에요

인생의 장면들 (10)


“밖에서는 이렇게 웃고 떠들고, 활동적이고.... 그러니까 제가 되게 즐겁게 사는 것처럼 보이나 봐요. 사람들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유복한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막내딸 같은 이미지가 있다고... 근데 사실...”


연희가 말을 흐리더니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연희의 긴 생머리가 흩날린다. 이메일과 문자로만 연락하다 오늘 처음 만난 연희는 미인이었다. 하얀 얼굴에 큰 눈.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쁘다’고 생각할 만한 외모.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나. 유복한 집에서 사랑받고 자랐을 것 같다고.  


“… 집에 오면… 완전히 시궁창이에요. 안과 밖의 괴리가 되게 커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 저의 삶의 괴리가. 그것 때문에도 좀 힘든 게 있는 것 같아요.”


누구나 인생에서 불행은 있다. 그런데 연희의 불행은 너무 어릴 때부터 찾아왔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시골의 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연희가 손자가 아닌 손녀라는 이유로 미워했다. 농사일을 시키고 못하면 때렸다. 그러다 다시 아버지와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매일 소리를 지르고 무언가를 부수고 돈은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렇게 서른을 넘겼다. 아버지가 병을 얻었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아파지셨는지 매시간 전화를 걸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어렸을 때 헤어진 어머니와는 성인이 되어 연락이 되기 시작했는데, 딸과 함께 살지 못한 서러움 혹은 죄책감 때문인지 매일 전화를 걸어 한탄을 늘어놓는다. 


“전화해서는 한 시간을 혼자 얘기해요. 하는 말도 매일 똑같아요. 사과즙을 보냈으니 먹어라, 김치를 해서 보냈으니 먹어라, 떡을 보냈다,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한데 너는 왜 그걸 몰라주느냐... 근데 하나도 안 불쌍하거든요? 좋은 사람 만나서 돈도 잘 절고 잘 살고 있거든요. 물론 엄마도 힘들었겠죠. 어린 나이에 자기 애들이랑 헤어졌으니.... 근데 애였던 저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하려고 드는 게 참... 뭐 그런 거 바라지도 않지만... 아빠는 또 아빠대로... 두 분 다 제가 어디까지 받아줘야 될지 모르겠고.... 솔직히 두 분이 저한테 뭐 해준 거 없거든요. 해주기는커녕 너무 안 좋은 환경만 만들어줬는데.... 제가 이렇게나마 문제없이 자라준 것만 해도 감사하게 여겨야 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두 분은 저한테 원하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저는 그게 너무 억울하고... 그냥 제가… 사라져 버리고 싶어요…”

연희가 부엌 테이블에 놓인 갑 티슈를 한 장 뽑아 눈가를 닦아낸다. 


“... 이 시궁창에서 탈출하고 싶어요. 이런 얘기하면 사람들은 그럼 결혼하라고 하는데, 절대 싫어요. 결혼은 저에게 탈출구가 될 수 없어요. 제 발목을 붙잡는 부모... 가족... 이런 거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건데 결혼은 또 다른 억압의 시작일 뿐이잖아요. 결혼을 하면 여자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무들... 명절에 시댁에 가야 하고, 시댁에 가면 주방으로 직행해야 하고, 애를 낳아야 하고, 그것도 몇 살까지는 낳아야 하고, 어떻게 키워야 하고... 저는 그런 걸 받아들이지 못하겠더라고요. 이런 얘길 하면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냐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라면 누구 피해 주지 말고 아예 결혼을 하지 말라는 사람들도 있어요.”

“… 이기적이라고요?”


“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이기적이든 말든, 결혼은 안 하고 싶어요. 아무튼...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고, 그렇다고 결혼은 답이 아니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고… 그래서 생각해낸 게 있어요.”

“뭔데요?”


“외국이요. 외국에 가고 싶어요. 외국 중에서도 시골. 일 때문에 미국이랑 중국의 시골 마을에 몇 달 정도 머물러본 적이 있거든요? 물론 짧게 머문 거라 늘 좋을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좋았어요. 서울에서 막 바쁘게 살다가 뭔가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사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제가 외국인인 게 좋았어요.”

“외국인이어서? 외국인이어서 차별받고 그런 건 없었어요?”


“워낙 시골이어서 그랬는지 그런 건 잘 못 느꼈어요. 물론 오래 살면 그런 것도 있겠죠. 근데 제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저한테 주어진 의무와 역할, 임무가 적은 거예요. 그게 너무 좋았어요. 그러니까... 한국에 있으면 가족도 있고 친척도 있고... 친구도 있고… 그런 만큼 그 관계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역할들이 있잖아요... 결혼식도 가야 하고, 돌잔치도 가야 하고, 약속도 만들어서 사람들 만나야 하고... 자식 된 도리도 해야 하고… 뭔가... 인간의 ‘도리’라는 걸 하려면 해야 되는 게 너무 많잖아요. 근데 외국으로 가버리면.... 제가 그 도리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거잖아요. 내가 나쁜 사람이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못하게 되는…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제가 한국에 있으면 가족이고 친구고 연결된 사람들이 많고... 그만큼 저를 압박하는 게 많은데 그런 거를 다 무시하고, 탈피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나의 이 탈출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그게 바로 외국으로 가버리는 거더라고요… 이 집… 이 집을 떠나서…”


이 집. 연희가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집. 부엌 테이블 위에 놓인 액자에는 연희와 연희 가족들의 사진이 담겨있다. 사진 속 어린 연희는 무표정하다. 


“어렸을 때부터 이 집에 들어오는 게 늘 싫었어요. 집이 저의 안전한 보금자리... 내가 쉴 수 있는 곳... 그런 곳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근데 외국은... 적어도 제가 경험한 외국은 되게 편안했어요. 서울의 저는 할 일도 많고, 역할과 의무도 많고... 늘 누군가 나를 평가하고 있고… 죄책감... 죄책감도 있고... 근데 외국에서는. 나. 나 하나만 있으면 되잖아요. 나 하나만 생각하고... 그런데 또...”


잠시 찾아온 침묵에,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웠다. 


“가족…”


연희가 테이블에 놓인 사진을 슬쩍 본다. 연희의 눈가가 붉다. 


“… 가족 때문에 사라지고 싶은 건데… 가지 못하는 것도 가족…. 가족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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