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석하게도 나는 우리 부서에서 결혼을 안(혹은 못)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기혼자들은 어째서 남의 혼사에 그리도 관심이 많은지, 매 조언마다 ‘역시 정의 민족답다’며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그중에서는 자신이나 지인의 연애·결혼 이야기로 본격적인 참견을 하기 위한 밑밥을 까는 이야기꾼도 있다. 대부분의 말들이 딱히 내 결혼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남의 연애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없기에 꽤 즐거운 마음으로 타인의 삶을 경청하는 편이다.
오늘 들은 삶의 조각은 이랬다. 박 선배의 친구는 말이 많아서 조용한 남자가 좋았단다. 하지만 결혼을 하니 무뚝뚝한 것이 장점이던 남자는 본인의 장기를 십분 발휘하여 다투었을 때에도 입을 닫아버렸고, 그것이 결국은 이혼사유가 되었다고 했다.
사람이 좋았던 이유는 반드시 싫은 점이 돼.
그 부분을 네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해.
박 선배의 말이 유독 마음에 닿았던 이유는 나 또한 스스로를 양면적 인간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지극히 감성적인 사람이라서 쉽게 감동하고 타인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는 반면, 때때로 혼자서 주체하기 힘들 만큼 감정이 널을 뛴다. 또 열정에 타올라 재빠르게 추진력을 발휘하는 것이 강점이지만 체력과 끈기가 부족해서 이내 번아웃 되어버리는 것이 그것을 쉬이 덮을만한 치명적인 약점이라 안타깝다. 아마 냄비 근성이라는 단어가 인간화된다면 바로 나일 것이라는 데 한 치의 의심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나와 반대인 사람이 좋았다. 내 감정이 파도를 치니까 마음의 물결이 잔잔한 사람과 있으면 덩달아 평온해졌고, 내가 끈덕지지 못하니 성실한 사람을 보면 존경할만해 본받고 싶어졌다. 소호는 무던하고 은근하게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다. 갖은 화려한 말로 요란하게 사랑을 뱉는 나와는 달랐다.
소호의 심장을 꺼내어 볼 수는 없지만 나는 그 마음의 풍경을 곧 잘 상상하곤 했다. 소호의 세상에는 넓고 청련한 바다가 있었다. 아무리 심한 파도가 일렁여도 그 가운데 오롯이 선 작은 암좌를 덮을 만큼의 물결은 절대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말썽꾼인 나는 난폭한 범고래가 되어 온통 그의 신경을 휘젓고 싶어 했지만 그는 암좌에 모셔진 불상처럼 한결같은 미소를 지으며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호와 있으면 물 위로 솟아올라 한껏 뛰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안전하게 바다를 유영할 수 있었다.
그는 나와 다르게 꾸준한 사람이기도 했다. 사귀는 내내 날씨와 사정에 상관없이 꿋꿋하게 나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처음에는 ‘며칠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함이 없었다. 이제 됐다고 너희 집에 가라며 등을 떠밀어도 이러는 게 맘이 편하다며 그저 내 손을 꼭 잡고 방향을 돌릴 뿐이었다. 차게 식은 자취방으로 들어갈 때 마음마저 싸늘하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뭉근한 배웅 덕분이었다.
소호는 내게 없는 것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소호의 그런 모습들이 항상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그의 고요한 마음에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고 간단없는 태도에 답답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완벽한 사람은 없고 모든 일에는 장·단이 있는 법이니까. 소호가 나의 단점을 견뎠듯이 나도 꽤 그럴만했다. 서로의 성향이 너무 달라서 오히려 각자의 모자람을 보완했다.
반대로 나와 같은 성격의 사람을 사귄다고 생각을 하면, 아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의 결함들을 내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서로의 강점과 약점은 중화되지 못하고 어느 극한으로 치달을 것이고 나는 도저히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대단히 근사한 사람보다는 그저 나의 허점을 보전해 줄 아귀가 맞는 사람이 좋았다. 서로의 모난 부분을 갈아 맞춰갈 의지가 있는 사람을 바랐다. 그러기엔 갈아버려야 할 내 모난 가시들이 좀 많기는 하지만.
상대의 결함이 견딜만한 정도라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내가 안아주는 것도 고운 일이다. 눈치 없는 내가 알아채지 못했을지라도 이미 그 또한 나를 사랑으로 다정히 감싸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