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같은 남자 어때?”라는 질문에 세상의 모든 딸들의 반응은 두 가지밖에 없다. '나는 꼭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고 싶어'라고 하거나 '아빠 같은 남자? 오, 절대 안 돼!'라는 절망에 가까운 탄식. 나는 늘 ‘아빠 같은 남자’라는 말만 들어도 경끼를 하는 쪽이었다.
나와 내 친구의 아버지들은 경상도에서 나고 자랐다. 우리는 종종 경상도 남자들은 가망이 없다거나 자신의 아버지가 별로인 남편들 중에서도 가장 별로라는 주장을 경쟁적으로 펼쳤다.
괜찮은 남자로 거듭날 여지가 전혀 없는 엄마의 남편은 식탁에 앉으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밥을 먹다가 목이 마르면 ”물!”이라며 컵을 내밀었고 국이 더 필요하면 “국 더 있나?”며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는 불편한 기색 없이 재빠르게 일어나 그의 빈 그릇을 채워주었다. 그녀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해도 엄마는 놓친 것을 챙기느라 가장 늦게 식탁에 앉았다.
아빠는 식탁에 앉기 전 자신의 수저를 챙겨 오거나 식사를 마친 후 싱크대에 그릇을 담가 놓지도 않았다. 나와 동생도 그랬다. 우리는 오랫동안 엄마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엄마가 외출을 했을 때 배가 고파서 냉장고라도 뒤적거리면 아빠는
“조금만 기다리지? 너거 엄마 금방 올 텐데.”라고 말했고 설거지가 쌓여 고무장갑이라도 끼려고 하면
“놔둬라. 너거 엄마가 한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집안일에서 배제했다. 그는 가사 노동을 온전한 아내의 몫으로만 남겨 두었다.
시대는 바뀌고 있는 중이다. 여자도 우리의 아버지처럼 돈을 벌고 남자도 어머니처럼 집안일을 한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맞벌이를 한다. 드물게 외벌이를 하는 친구들도 아내만을 집안일의 영역으로 밀어 넣지는 않는다.
드센 여자를 조롱의 대상으로 표현하던 TV프로그램들은 이제 가부장 적인 남성을 질타의 대상으로 삼는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10여 년 전과 비교한다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여성들의 높아진 취업률 때문에 남자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말하는 구시대의 어른들도 있지만 우리는 바깥일이든 집안일이든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함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늘 좀 더 평등해진 세상으로 향하는 과도기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외상 후스트레스 장애를 가진 사람처럼 아빠와 같이 가부장적인 남편을 만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다. 엄마와 다툰 후 생활비를 주지 않거나 밥상에 숟가락을 던지듯 내려놓던 아버지의 모습은 내가 유일하게 가까이서 접한 남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환상은 고사하고 ‘남편이 조금이라도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면 당장 이혼해야지’ 혹은 ‘결혼을 해서도 결코 직장을 그만두지 말아야지’ 같은 다짐만이 남게 되었다.
남편의 역할과는 별개로 아버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딸을 아주 많이 사랑해 주었다. 구태여 사랑한다 말하지 않는 경상도 남자일지라도 그의 눈을 보면 내가 그의 한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빠가 엄마를 사랑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아내에게 다감하지 않았고 때때로는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지 않는 듯도 했다. 나에게는 좋은 아버지이지만 엄마에게는 나쁜 남편이라는 괴리감은 오랫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그래서 아빠가 아끼는 딸에게 농담을 던지며
“대충 눈, 코, 입 달렸으면 이제 그만 고르고 시집가라.”라고 말을 할 때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아빠 같은 사람 만날까 봐 내가 시집을 어떻게 가!”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아빠가 엄마에게 좀 더 다정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화목한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라났다면 결혼은 내게도 꼭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별로 중에도 최고로 별로인 남편의 모습을 오랫동안 보고 살아온 탓으로 이제 내게 결혼은 그 모든 미지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사랑에 뛰어들고 싶을 때야 겨우 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