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혼자서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다. 엄마는 영어가 전병인 딸이 외국에 나가서 국제미아가 될까 봐 출국하는 날까지 신경질을 부리며 걱정 어린 한숨을 뱉었다. 반대로 무심함이 하늘을 찌르는 나는 떠나는 날까지 꼭 그렇게 짜증을 내야 속이 시원하냐며 엄마를 쏘아붙이고는 다정한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고 현관을 나섰다. 그리고 여행 내내 단 한 번도 엄마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심술이 나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연락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40일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한쪽 바퀴가 깨진 노란색 캐리어를 받아 들며 말했다.
“너는 어쩌면 연락 한 번을 안 하니?”
“어디 간 줄 알잖아,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뭐.”
나는 대부분의 경우에 무소식이 희소식인 삶을 살았다.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도 용건이 없으면 구태여 연락하지 않았고 사족을 길게 붙여 말하는 동생과 대화를 할 때는 요점만 말하라며 채근했다.
나의 무심함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을 것이다. 엄마가 가족을 모아 대화방을 만들면 그녀의 공지를 읽지도 않은 것 같은 아빠가 제일 먼저 나가버리고, 그 뒤를 따라 나 역시 나가기 버튼을 눌러 버리고야 말았다. 그래서 우리 집은 가족 단톡방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집에 ‘며느리’라는 존재가 생기자 언제나 당연히 그래왔던 것처럼 가족 대화방이 생겼다. 엄마가 서른 살이 넘은 성인들에게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지?’ 같은 하등 쓸데없는 안부를 물으면 올케가 동생과 놀러 갔던 사진을 보내주며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엄마는 한동안 며느리를 포함한 가족의 결속에 열을 올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런 의도적 친밀함에 취미가 없는 나는 불행하게도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몇 주간 눈치만 보다가 ‘나가기’ 버튼을 눌러 버리고야 말았다.
어쨌든 조카가 둘이나 생긴 지금까지도 가족 대화방이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나만 없는 가족 단톡방이. 며느리의 존재는 가족 대화방이 만들어진 이래로 그것을 가장 오래 유지하게 만드는 기록을 세우게 만들었다.
올케는 딸인 나와 다르게 때마다 나의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했다. 아주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나보다는 훨씬 더 많이 하는 것 같았다. 가족 모임이라도 있는 날에는 부모님의 출발과 도착 여부를 확인하며 살뜰히 챙겼다. 조카들이 태어나고 나서는 더욱 자주 연락했다. 내가 없는 가족 단톡방의 알림이 울리고 나면 어김없이 아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올케를 보고 있으면 나와 달라서 신기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걸까 해야 해서 하는 걸까?’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께 먼저 전화하지 않은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덮어놓은 시간 속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살아있으니 그것만으로 희소식이다. 오늘도 나는 전화를 하지 않겠지. 며칠이 지나면 딸의 생사를 궁금해하는 엄마가 참지 못하고 전화를 할 것이다.
최근에 화상을 입어서 허벅지에 검지 손가락만 한 물집이 잡혔고 숨이 붙어 있으니까 살고 있고 당분간 본가에 가지 않을 것이지만 ‘별일 없다. 잘 살고 있다. 조만간 갈게.’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다시 엄마가 전화할 때까지 연락하지 않겠지.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온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평화롭다. 어쩌면 나는 오래전부터 아빠가 이놈의 집구석이라고 불러왔던 전쟁터에서 조용히 ‘나가기’ 버튼을 누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