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
하굣길에 비가 왔다. 중앙 현관에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이 하나둘씩 엄마를 찾아 떠나고 남은 아이들이 몇 명 없을 때쯤 빗속을 뛰어 집으로 갔다. 엄마는 한 번도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오지 않았다. 몇 번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부터는 기다리기를 포기했다. 한데 2년이 지난 후, 동생이 나와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자 엄마는 우산을 들고 동생을 데리러 갔다. 원래 마중을 나오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단지 ‘나를’ 마중 나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비에 젖은 채 집으로 돌아온 여러 날이 섭섭하지 않았는데 비가 와도 솜털까지 보송한 동생을 보니 서러움이 밀려왔다. 엄마는 동생과 나를 차별했다.
엄마는 나와 다툰 날에 온종일 쌀쌀맞게 굴다가 아빠가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능청을 떨며 상냥하게 대했다. 그러다 다음 날이 되어 아빠가 출근을 하면 다시 냉랭한 태도로 일관했다. ‘친엄마가 아닌가?’라고 의심했던 적도 있었지만 모녀간에 얼굴을 빼쏘았으니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왜 그랬을까? 자신에게 모질게 굴던 남자가 딸에게는 한없이 상냥한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걸까? 이유가 궁금하지만 ‘내가 언제 그랬니?’라며 말간 얼굴로 대답을 할까 두려워 물어볼 자신이 없다. 늘 기억하는 것은 상처받은 자의 몫이니까.
엄마가 미웠다. 크면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많은 날을 다짐했었다. 엄마가 늙었을 때 돌보지 않을 것이라고, 엄마가 좋아하는 아들에게나 병든 육신을 맡기라고 할 작정이었다. 아빠가 아프면? 당연히 내가 돌봐야지. ‘나도 둘을 차별할 거야. 어렸을 때 겪었던 설움을 똑같이 돌려줄 거야.’라고 생각했다.
엄마, 솔직히 마음이 더 가는 자식이 있지?
라고 물었을 때 엄마는 부정하지 않았다. 열손가락을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더 아픈 손가락은 있다며 동생은 늘 눈에 밟히는 자식이었다고 했다.
“나는 너를 한 번도 애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의젓하고 입을 대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던 장녀. 나는 엄마의 자식이기보다 친구에 가까웠다. 동생이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의 아기는 내가 아니라 동생이 되었다. 엄마는 나를 의지하고 동생을 돌보았다. 어느 순간은 그것이 당연해져서 더 이상 섧지 않았다.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니까. 엄마는 우리를 다르게 사랑한 것뿐이라고 자위했다.
엄마가 동생을 더 사랑하기는 했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나를 미대에 보내기 위해 공장에 다녔다. 1년 동안 일을 하고 받은 월급을 고스란히 미술 학원비로 지불했다. 그녀는 나의 합격을 가장 기뻐한 사람 중 하나였고 내가 디자이너로 일하기를 포기했을 때 나보다 더 아쉬워한 사람이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3년 반 내내 도시락을 싸주었고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로 패악질을 부리는 나를 견뎌주었다. 엄마에게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내 허황된 꿈을 지원해 준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엄마는 나를 ‘나의 꿈’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에게 엄마는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나에게 한 가지 감정으로 정의될 수가 없는 사람이다. 엄마에게는 깊은 애정과 오랜 증오가 끈끈하게 뒤섞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