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린이는 왜 운동을 결심했을까
아빠의 엉덩이에 관한 일화는 30여 년 전 엄마 아빠의 첫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마와 아빠는 선을 보아서 결혼하셨다. 엄마가 아빠를 처음 보았을 때 엄마 나이는 26세였다.
20대 중반의 엄마는 결혼이 급하지 않았다. 외할머니의 성화로 선자리에 나가긴 했지만, 5살 많은 '아저씨'와의 만남을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자리에 나온 남자는 생각보다 젊었고(?), 같이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도 제법 즐거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깜짝 놀랐다. 계산을 하고 앞장서 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았는데, 잘못 본건가 눈을 의심했다.
'이 남자 엉덩이가 없잖아?'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의심하고 다시 보았는데, 엉덩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엉덩이가 정말 없더란다. 다리 위에 바로 등이 있었다나.
이 이야기를 엄마한테서 들을 때는 깔깔 웃기에 정신없었는데, 이후 두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궁금증 1
도대체 얼마나(?) 엉덩이가 없었길래 엄마가 놀란 걸까
궁금증 2
엄마는 왜 아빠의 엉덩이를 유심히 본 걸까
아무튼 나는 그런 아빠를 쏙 빼닮았다. 엉덩이가 없는 것도 그렇고, 팔다리도 그렇다.
나는 키에 비해 팔다리가 긴 편이다. 다리가 눈에 띄게 길었으면 좋겠지만, 팔이 유난히 길다. 그래서인지 내가 줄넘기를 하고 있으면 팔 길이가 남아서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모양이 된다.
아빠 다리는 길기만 한 게 아니라 가늘기도 해서, 뒤에서 보면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아빠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런 다리를 가진 여자로 살아가는 것은 불평한 일은 아니다. 그나마 있는 종아리 근육도 보기 좋게 하기 위해 아이돌 주사를 맞는 나라에서 살고 있으니 더더욱.
그러나 미용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기능적으로는 아주 형편없다. 몸에 비해 다리가 가는 편이라 구조적으로 안정적일 리가 없다. 다리가 떠받치고 있어야 하는 무게에 비해 두께가 약해서, 발목과 무릎은 조금만 무거운 걸 들거나 많이 걸어도 쉽게 피로해진다. 비 오는 날 무릎이 시릴 때면 좀 더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중학생 때 처음 내가 엉덩이가 없어서 청바지 핏이 별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별 자각 없이 오랫동안 살았다. 엉덩이가 없는 건 그다지 불편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20살 때부터 헬스장을 다녔다. 딱히 몸을 만들겠다고 다닌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인생에서 체육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덥거나 추울 때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기 위해서는 헬스장 같은 실내 운동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20살 이후 이러한 이유로 헬스장에 등록했고, 스트레칭이나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몸의 생김새에 대해서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잊고 있던 '엉덩이 없음'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고, 빈약한 엉덩이에 대한 불만족스러움이 꾸물꾸물 피어났다. 이러한 불만족스러움은 옷을 고르는 데서 종종 튀어나와 쇼핑의 순간에 불편함을 만들어냈다.
결심은 불편에서 나온다. 본격적으로 ‘열심히’ 운동을 하게 된 것은 엉덩이가 없어 보이는 마음의 불편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나는 부모님께서 주시지 않은 엉덩이를 내가 스스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나는 마치 선전포고처럼 “어머니께서 주지 않으신 엉덩이를 만들러 갑니다”하며 운동을 다니곤 했다. 수술이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몇몇(...) 신체 부위들과는 다르게, 엉덩이는 나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만들어낼 수 있는 부위라 희망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엉덩이를 키우는(새롭게 만들어내는)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청운의 꿈을 안고 스쿼트 챌린지에 적극 동참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