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이 길어지니 결국 이런 일까지 벌어졌다.
어머니와 나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처음에는 그저 바쁘셔서 콜백을 잊으셨나 보다 했는데 카카오톡을 읽고도 답이 없으셨다. 다시 답을 주시겠지 기다렸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 어머님에게 읽씹을 당한 것이다.
어머님의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가 혼란스러웠지만 설마 했던 그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신혼 1년 차, 아는 동생이 키우지 못하게 된 고양이를 입양했다. 본가에서도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었고 남편 역시 혼자 살면서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웠던 사람이라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고롱이를 식구로 맞이했다. 고롱이는 고롱고롱 골골송을 잘 부르는 개냥이라 붙인 이름이다. 이 작은 고양이와 사랑에 빠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롱이의 등장은 어머님의 예상 밖이었다. 하필 어머님이 다니시는 철학원에서 우리 부부가 식구가 늘어날 기회가 온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고롱이가 된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난임 판정을 받기 전이라 철학원의 이야기를 전하며 어머님은 못마땅해하셨지만 크게 문제 삼지 않으셨다.
하지만, 문제는 난임 판정을 받고 임신이 안 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기게 되었다.
어머님이 다니시는 철학원에서는 고롱이가 '재수가 없는 고양이'였다. 고양이도 일종의 사주가 있는데 좋은 고양이를 키우는 건 문제없지만 고롱이는 재수가 없는 고양이라서 우리에게 올 좋은 일을 막는다는 것이다.
물론, 어머님께서는 내가 이 고양이를 너무 사랑하는 걸 알고 계셨기에 매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셨다. 고양이를 키우지 않았으면 한다고. 내가 어느 정도 양보를 하길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나 역시 어머님의 진심을 서운해하지 않았다. 당연히 어머님의 믿음 안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절대 내 입에서는 '예, 어머님'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결혼 날짜, 이사 날짜, 이사하는 동네 모든 것을 그 철학원의 뜻에 맞춰 움직였지만 이것만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갑자기 어느 날,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머님이 갑자기 참을 수 없으셨나 보다. 남편을 통해서 최후의 통첩을 날리셨다. 고양이를 어디론가 보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연락을 주지 않으셨다. 졸지에 남편은 어머님과 내 사이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고롱이를 데리고 온 것도 나, 고롱이를 못 보내는 것도 나 그리고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것도 나였다. 이 일은 전적으로 나의 일이었다. 남편을 중간에 놓고 해결하라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어머님께 찾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어머님과의 담판이 벌어졌고 그 후 약 1년 정도 어머님과 연락을 하지도 뵙지도 않았다.
어머님은 아이를 가지기 위해서 자신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 나를 답답해하셨고 나의 아이에 대한 진심을 의심하셨다. 그리고 결국 어머님은 '고양이야? 나야?'를 시전 하셨다. 고양이를 처리(!) 하기 전까지는 자신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질문만은 제발 하지 않으시길 바랐는데, 그냥 한 번은 계속 져주시길 바랐는데 나 역시 어머님에 대한 감정이 크게 상해버렸다.
실제로 어머님과의 담판 이후, 본가와 주변 친구들에게 고롱이를 보내는 걸 알아봤다.
남편을 위해서였다. 고롱이를 보내고 말고 와 상관없이 나는 어머님을 한동안 보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남편을 아예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롱이를 사랑으로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부탁해보고자 했다. 남편도 그걸 싫어하진 않았다. 되려 이 상황이 돼서야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꾼 내가 미웠을 것이다.
남편이 나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평소 본인의 뜻을 크게 거스르지 않았던 아들의 결정에 가장 놀란 건 어머님이셨을 것이다. 그렇게 남편은 결정적일 때 본인의 역할을 했다. 나의 편, 현재 나와 고롱이라는 가족을 선택한 것이다. 근데 참 이상하지, 남편이 고마우면서도 어머님께 죄송한 마음이 드니 말이다.
그 후 우리는 철저히 세 가족으로 지냈다. 다만 그만큼 남편에게는 어머님을 더 잘 챙기라 당부했다. 남편도 유난스럽지 않지만 본인만의 방법으로 어머님을 잘 챙겼다. 그렇게 명절, 어머님의 생신과 같은 마음이 무거운 날들이 지나갔다. 고롱이를 잠시 동생의 집에 보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어머님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도 가라앉으니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결국 다 행복하게 살려고, 행복해질 방법을 찾기 위해서 다툰 것인데 고양이를 키우는 상태에서 아이를 가져 어머님이 틀렸단 걸 증명하겠다고 아랫사람인 내가 부득부득 이를 갈고 있는 게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사주가 재수 없는 고양이 때문에 아이를 어렵게 가질 운명이라면 조금이라도 덕을 쌓으면 그 고양이의 재수 없음을 상쇄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사랑하는 가족, 고롱이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태풍을 핑계 삼아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님도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 없으셨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물론, 완전히 예전과 같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인터넷 게시판에나 있을 법한 임신, 고양이, 고부갈등 이 뻔한 이야기가 나에게도 벌어지다니. 도대체 나를 얼마나 단련시켜 좋은 엄마가 되게 하려는 건지. 참 엄마되기 어렵다.
p.s 이 과정에서 남편의 마음은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