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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oocation Dec 31. 2023

두 줄, 두 줄 합이 네 줄. 코로나와 임테기

임테기 두 줄과 함께 코로나도 함께 왔다.

22년 3월 첫 시험관 시술을 했다. 이전과 다른 방법을 시도했으니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과 희망을 품은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실패에 대한 대비도 했다. 시험관 1차 만에 성공한다는 건 기적이라는 난임 카페의 글들을 되뇌면서 마인드 컨트롤도 열심히 했었다.

하지만, 마음이 계속 한쪽으로 기울어가는 건 어찌 막을 도리가 없었다.


시술 후 1차 피검사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주말 아침이었다. 몸이 무겁다는 남편, 갑자기 걱정되어 코로나 키트를 사 와서 검사를 해보라 하니 또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란다. 찝찝한 건 사실이었지만 진짜 증상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면 남편이 좀 더 기민하게 움직였을 거라 생각했기에 나 역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고 함께 아침식사를 마쳤다.


하지만, (이미 결론을 예상할 수 있겠지만) 우리 부부의 안일함을 비웃듯 코로나 키트에는 두 줄이 떴다. 너무 화가 났다. 남편이 너무 미웠다. 아픈 사람에게 대한 예의는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때는 남편이 아픈 것보다 남편의 안일함에 화가 났다.


'지금 내가 시험관해서 조심해야 하는 시기인데. 니 몸은 네가 조심해서 더 예민하게 굴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몸이 안 좋았으면 나랑 같이 아침 먹기 전에 키트 사 와서 했었어야지!!!!' 씩씩거리면서 화를 빽! 하고 냈다. 그 분노는 남편에게 향하긴 했으나 괜찮겠지 했던 나 자신에 대한 짜증과 실망도 섞여 있었다. 남편을 탓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안방에 남편을 유배시켰다. 말이 유배지 컴퓨터와 책상, 게임기를 넣어주고 매 끼니 챙겨주니 이런 고오급 룸서비스가 없다.



하지만, 이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틀 만에 나의 목이 따끔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 나도 걸렸구나' 그렇게 나의 코로나 키트에도 두 줄이 떴다. 1차 피검사일 이틀 전의 일이었다.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기 위해 병원 가기 전 어쩔 수 없이 임신 테스트를 했다. '어쩔 수 없이'라는 표현을 쓴 건 피검사일 전에 임신 여부 테스트를 하지 않겠다던 나의 다짐을 깰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임신 테스트기를 섣불리 시작했다가는 내내 노예가 되어 버린 날들의 레슨런이다.) 기대는 했지만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이미 결론을 예상할 수 있겠지만) 나의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비웃듯 임신 테스트기에는 두 줄이 떴다. 그렇게 보고 싶던 두 줄이였는데, 막상 보니 믿기지가 않았다. 창가로 다가가 이리저리 임테기를 돌려 본다. 두 줄이다.

그렇게 난 울었다. 기쁘면서도 절망스러웠다. 

이 두 줄이 생겼다는 것보다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이 더 컸다.

왜 코로나 키트도 두 줄, 임신 테스트기도 두 줄이냐고!!!!!!

남편은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느냐' 했지만 '야 이 자식아 지금 내가 부정적인 생각 안 할 상황이냐!!!'


코로나 진단을 받으러 간 병원에서도 혹시 모르니 타이레놀만 처방해 주었고 격리가 시작되었다. 친한 친구들에게 낭보와 비보를 동시에 전했다. (당연히 부모님께는 비보만을 전했다.) 친구들에게 임테기 두 줄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는 막상 기분이 몽글몽글하면서 진짜 임신 성공한 느낌이었다. 친구들은 나를 위해서 배달어플을 이용해 과일, 죽, 디저트를 보내줬다. 남편은 임신테스트기를 공구하는 사람처럼 20박스 넘게 주문했다. 나는 네이버 계산기로 출산예정일을 계산했다. 설레발의 연속이었다.


"마음껏 테스트해 보자! 라며 임테기를 한 아름 주문한 남편. 이 임테기는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코로나 두 줄과 임테기 두 줄은 서로 연결되어 있던 걸까? 코로나의 기세가 사그라들수록 임테기 역시도 점점 색을 잃어갔다. 짙어지지 않은 임테기를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던 일이라곤 난임 카페의 글을 필사적으로 뒤지는 일 밖에 없었다.


임테기 색이 짙어지지 않아도 임신이 성공되는 실낱 같은 희망의 사례들을 뒤지고 뒤졌다. 99개의 사례가 나의 실패를 이야기했지만 어쩌다 찾은 1개의 성공 사례가 내가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격리 때문에 병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너무 심적으로 힘들었다. 차라리 피검사로 수치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서서히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코로나가 힘든 게 아니었다. 실패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말라가는 과정, 초조함이 너무 나를 지치게 했다.

그래서 격리가 끝나고 피검사 결과가 나왔을 때 슬프기보다는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의연, 긍정한 남편은 나를 위로한다. 남편이라고 왜 나에게 미안하지 않겠으며 왜 속상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란 걸, 불임이 아니란 걸 확인할 수 있었잖아?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나는 조금 더 희망을 가지게 되었어"


그 말이 아예 얄밉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나를 격려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점을 생각하며 수긍한다.


그렇게 우리의 코로나, 첫 임신 시그널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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