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하늘길이 열리고, 우리 가족은 싱가포르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사이 만료된 여권을 새로 만드는 것부터 조금씩 여행 준비에 기지개를 켰다. 출국일이 가까울수록 처음 비행기를 실물로 영접하는 둘째에겐 마냥 설렘으로 가득 찬 시간이, 높은 하늘을 나는 것이 막상 두려운 첫째에겐 설렘 반 두려움 반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런 아이들의 여행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까마득한 마지막 해외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공항에서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 비행기를 탈 것인지 설명해 주었다.
아이들이 평소 영어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지 않지만, 여행을 가면 모든 걸 영어로 해야 하니 슬슬 영어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 햄버거 등 자신들의 메뉴를 원 없이 주문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영어책을 함께 읽었다. 싱가포르 여행을 한 달 남겨두고 집에 있는 영어책 난이도를 살짝 올려 스토리북으로 바꾸어 아이들과 낄낄 거리며 읽기 시작했다. 장난꾸러기 캐릭터들의 천방지축 에피소드에 푹 빠진 아이들은 오히려 언어의 갭보다도 스토리가 궁금해 매일 책을 골라 엄마에게 읽어달라고 들이밀었다.
두 아이와 함께 하는 첫 해외여행인 만큼 걱정도 컸다. 무엇보다 안전에 있어서 한눈을 팔지 않고 아이들을 잘 챙겨야겠다는 마음과 함께, 정해진 계획에 맞춰 아이들을 보채느라 아이만의 속도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방해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싱가포르에 도착하자, 우리의 여행 스케줄을 비웃기라도 하듯 첫 계획부터 차질을 주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캐리어 분실
함께 부친 유모차는 쉽게 찾았는데, 마지막 캐리어가 컨테이너 벨트를 빙빙 도는데도 우리 집 와인 컬러 캐리어는 나올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 것과 무척 흡사한 캐리어가 남은 걸 보니, 착오로 생긴 분실이라 생각이 들었다. 예정대로라면 서둘러 택시를 잡고 호텔로 체크인했을 시간에 우리는 공항을 맴돌며 혹시나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을 캐리어를 찾아 헤맸다. 모든 승객들이 빠져나간 뒤 공항에 적막감이 드리웠다. 한참을 헤매다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Lost & found 부스로 가서 신고 서류를 작성했다. 우리의 근심과는 달리 세계 1위 공항의 위엄처럼 창이 공항의 스텝들은 덤덤하게 24시간에 연락을 줄 테니 호텔로 먼저 가라고 했다.
캐리어 분실 사건은 도미노처럼 유심카드 등 도착 후 공항에서 챙겨야 할 몇 가지 계획들을 연달아 삐그덕하게 했다. 한숨이 나오는 상황에서 나는 조금은 독특한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선 계획대로 하려는 욕심을 내려놓아야겠구나! 아이들에게도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르쳐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안정지향적인 첫째 아이는 호텔에 돌아와서도 수심이 깊은 얼굴 표정으로 "엄마, 우리 캐리어는 어딨을까요? 찾을 수 있겠죠?"라는 물음을 남발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럼, 걱정 마! 찾을 수 있어! 혹시 못 찾더라도 우리는 여행을 계속할 거야!"라며 아이를 다독였다.
싱가포르에서의 첫날 일정은 단벌차림으로 시작되었고, 느지막한 오후 도심을 누비는 크루즈를 타는 중에 공항 측 스텝으로부터 캐리어를 찾았다는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그는 호텔로 바로 보내주겠다고 했고, 어떤 여행객이 착오로 우리 캐리어를 가지고 갔다가 되돌려주었다고 이야기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누구보다 불안해했을 아이들을 꼭 안아줬다. 늦은 밤, 호텔 로비 한쪽에 서 있는 우리의 캐리어를 발견하자 아이는 달려가 기념 샷을 남겨달라고 했다. Bag is Back!!
이번 캐리어 분실을 통해 우리 가족에게 미친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크고 작은 감정의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큰 변화를 2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먼저는, 우리 가족이 모두 안전하게 함께 한다는 것에 감사.
때로는 물건이 많으면 짐을 챙기는 것에 아이들의 손을 놓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오히려 큰 캐리어를 놓고 숙소로 가는 길에서 우리 가족 네 명은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걱정하는 아이들을 위로하며, 가족의 누군가가 아닌 캐리어가 분실된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로 안도감과 감사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잃어버린 게 캐리어라서 다행이라고 아이에게 일러주었다. 아이에게도 우리 가족이 더 소중한 존재임을 깊이 깨닫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물건이 우리보다 중하지 않음을, 혹시 다시 못 찾게 되더라도 그 캐리어 속에 담긴 물건이 없어도 우리의 삶이 지장 받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담담한 마음까지 들었다. 예쁘게 입을 옷들을 바리바리 챙겼지만, 단벌 여행도 가볍고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다음으로는, 유연하고 침착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언어 실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
이 사건은 8살 난 아이에게 적지 않은 쇼킹을 주었다. 아이는 다이소에서 산 5천 원짜리 물총을 비롯해 집에서 애지중지 챙겨 온 아이템들을 떠올리며 다시 못 찾으면 어떡하냐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사건을 해결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찰했다. 공항 스텝과 대화하면서 싱가포르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엄마아빠의 모습, Lost&Found 신고서를 작성하면서 여권과 호텔 정보를 다시 체크하는 모습 등등 대응 과정에서 불가피한 영어로 소통해야 하는 모습이 아이에게 영어공부의 동기부여를 제대로 해준 것이다.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이는 꽤 자주 "아빠, 이건 싱가포르 영어로 어떻게 말해요?"라는 질문을 던지며 필요한 표현을 익히려고 했고, 진지하게 영어공부에 임하기 시작했다.
하루의 짧은 해프닝을 거쳐 캐리어는 우리 품으로 다시 돌아왔고, 우리는 그 사건을 겪기 전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마인드를 갖게 되었다. 어쩌면 웬만하면 피하면 좋을 일들이 우리에게 터닝포인트로 작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