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의 하루는 시간이 멈춘 듯 ‘여유’ 그 자체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맞춰 서두를 필요도 없고, 퍼포먼스에 대한 심적 부담도 없는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미 습관이 돼버린 조급한 마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아 여유와 보폭을 맞추는 노력이 필요했다.
어린 시절 나는, 서른네 살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모습일 거라고 믿었었는데...
자기 일을 알고(잘하면 더 좋고), 명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만 같은 느낌. 그러나 현실의 나는 스무 살 막막한 미래를 그리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다시 백지 답안지를 쥔 채로 서 있다. 서른네 살 사춘기에 빠진 것일까?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바쁘게 뭔가를 쌓아왔다는 것과 바닥난 체력으로 의욕과 열정이 떨어진 것…
축 처진 몸과 공허한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건강 체크를 해주는 앱을 열어봤다. 최근 내 걷는 양은 하루 권장 기준에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코로나로 마스크 낀 채 땀 흘리는 운동까진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매일 가볍게 동네 산책을 하기로 했다. 천천히 걷다가 경보하는 분들을 만나면, 그분들 뒤에서 함께 속도 좀 내는 정도로만! 그렇게 운동량을 조절하며 매일 선정릉 한 바퀴를 돌았다.
비가 오거나 미세먼지가 심한 날을 빼고 매일 나가다 보니, 자연스레 겨울이 서서히 물러가고 봄이 찾아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꽃눈이 곧 터질 것처럼 커지는 목련, 작지만 힘 있게 피어난 연둣빛의 새 이파리.. 식물 하나하나 자신들에게 필요한 생기를 품으려고 온몸을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는 자연의 경이로움에 진심의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바깥공기 좀 쐬러 나온 것이지만, 나 역시 온몸의 숨구멍을 통해 열심히 생기를 수집하는 건 아닐까?
온 세상의 풀과 나무, 해와 구름, 마주치는 사람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느껴지는 생기들을, (기다렸다는 듯) 내 안의 바닥난 생기 저장소에 하나씩 쌓는다.
무엇보다 위엄하고 강렬한 따뜻함을 선사하는 해와 눈이 마주치면 (눈부심도 잠시), 오랜만에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 것처럼 흥분되기 시작했다.
정말 창조주의 걸작품이다.
비의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 노래를 한창 빠져 듣다가도 기미 올라올까 해 뜨는 날은 밖에 안 나가고 카페로 피해버리기 일쑤였는데…
모든 것이 방전된 지금에서 해가 그립고 좋다.
따뜻한 생기가 몸을 감싸 오면 충전기에 꽂혀 다시 켜지기 시작한 스마트폰처럼 찌릿하게 정신이 차려진다. 해를 많이 만날수록 마음도 따뜻해지면서 진정한 생기가 조금씩 차오르는 느낌이다. 그렇게 해를 보는 것이 나의 회복 리추얼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해를 보기 위해 산책을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기하게도 흐린 날 길을 걷다가 잠시 하늘을 쳐다봐도 구름 사이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민 해님을 만나고, 운전하다 잠시 정차하고 하늘을 쳐다봐도 해님과 쉽게 마주칠 수 있다. 그래서 해와 마주치는 다양한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산책을 하다 보면 시선을 핸드폰에만 고정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도심에 숨겨진 대자연이 봄을 향해 옷을 갈아입는 아름다운 모습들, 생명력을 뿜어내는 햇살… 어느 하나 놓치기 아까울 만큼 삶을 풍요롭게 도와주는 자양분인데... 무언가에 매여 바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겐 누릴 여유가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