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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심어린 로레인 Nov 10. 2021

셋째를 가져? 말아?

똑똑똑, 초보엄마 입니다.



두 아이들이 아기에서 점점 어린이들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하루하루가 아쉽다. 쪼꼬미 손이 어느새 묵직하게 잡힐 때나 아이 발바닥에 엄마 손바닥을 넘을 때면, 새삼 아이의 성장이 더 크게 와닿는다. 나는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좋은 엄마일까? 질문에는 선뜻 긍정의 답을 내기 어렵지만, 아이들이 좋은 건 사실이다. ‘좋은 엄마’라는 프레임을 내려놓고 그저 아이들의 살내음을 느끼며 한가득 안아주는 것이 참 좋다. 막내가 만 세 살을 향해 가는 지금, 나는 셋째를 가져야 하나?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아는 동생이 집에 놀러 왔다. 아기 가질 준비를 하는 그 친구는 몇 년 새 훌쩍 자란 우리 아이들을 신기해했다. 그 친구의 눈에는 내가 무척 육아를 즐기는 엄마처럼 보였나 보다. 육아 힘들지 않냐는 친구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이런 말이 나왔다.


“별로, 애들이 얼마나 이쁜데?”


자기 지인들은 다들 너무 힘들다고만 하는데, 유일하게 내가 그 반대의 답을 해줬다나… 그 말에 나는 내가 한 말을 다시 곱씹었다. 방송용처럼 정해놓은 멘트일까? 아님 나는 정말 육아가 힘들지 않을 걸까? 생각해본다. 아이들 챙기는 시간과 정신적인 에너지가 많이 드는 건 사실이다. 난장판 된 집을 치우려면 한 숨부터 나오는 건 사실이다. 서로 투닥거리고 불평하고 짜증 내는 아이를 받아주기 버거워 욱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힘든 순간보다도 아이와 함께 하는 베드타임 수다가 너무 즐겁고, 엄마 품을 다투며 엄마 볼에 뽀뽀하려고 달려드는 것이 마냥 행복하다. 나의 한정적인 육아 에너지에도 아이들이 주는 행복은 크다. 그래서 지금 이 시기의 더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아두려고 노력한다.


지난 주말, 조카의 돌잔치가 있어서 호텔 레스토랑을 방문했다. 거하게 차려진 돌상 앞에서 행복해 보이는 엄마 아빠와 멀뚱한 표정의 귀요미 조카를 축하해주는 자리였다. 사촌 여동생에게 조심히 다가가 예뻐해 주는 두 형제의 모습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갑자기 사돈어른께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둘째도 이제 제법 컸는데, 셋째 가져야 되는 거 아닌가요? 터울이 딱 좋을 텐데.”


순간 셋째 질문을 수없이 많이 받아왔지만, 무게가 있는 자리에서 사돈어른의 한마디가 더 크게 느껴졌다. 아, 셋째?! 가볍게 생각해서 그동안 숱한 질문에 ‘아직은 아니라고’, 아니 ‘이제 더는 아니라고’ 답했었는데, 이번엔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진지한 고민의 타이밍이 온 것 같았다. 우리는 조카를 셋째 딸 삼았다고 웃으며 넘겼지만, 마음 한편에 그 질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진지하게 신랑의 의견을 물었다.


“여보, 자기는 셋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음…”


제대로 답을 내리지 못하는 신랑의 모습이 나와 같았다. 우리가 답을 내릴 수 있을까? 막상 아들 둘 체력이 힘들어서 더는 안될 거 같다는 의사를 표할 수는 있겠지만, 아이들이 무척 사랑스러운 지금 우리는 너무나 큰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신랑과 정답이 없는 수다를 나누다가 어떤 방향으로도 매듭짓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우연히 유튜브에서 여성 사업가인 한 분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아이가 다섯, 최근 막내를 낳은 지 50일이라는 그 사업가는 당차 보이기도 하고 행복해 보였다.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육아는 돈이 많이 들어서, 막상 내 일에 에너지를 빼앗기니까 등 다양한 이유로 아이를 낳지 않는 분위기가 당연시되고 있는데, 이 분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앞선 논리에 비춰본다면 불행하고 힘들어 보여야 할 텐데, 실제론 무척 행복하고 일도 거뜬히 해내고 있는 멋진 엄마였다. 자녀가 주는 기쁨과 축복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아이를 갖게 돼서 너무 기쁘다고 고백하는 그녀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아이는 내 선택에 따라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곤 하는 데, 막상 난임에 고생하는 부부들을 만날 때면 생명의 소관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어쩌면 셋째는 내가 갖고 싶다고 노력해도 섭리에 따라 생기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니까. 자녀는 하늘이 주는 축복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막연한 걱정과 선택의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한다. 바로 내 곁에 있는 두 아이들과 더 찐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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