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가끔씩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찼다. 아무리 깊게 숨을 들이쉬어도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무언가에 압박감을 받으면 그런 느낌은 매번 더했다. 주말에는 집에만 있었다. 모두가 가는 쇼핑몰은 한가한 평일에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나를 향해 걸어오는 많은 사람들이 내 생각을 마비시키는 것만 같았다.
시골로 오기 전에 살았던 동네는 서울에서도 집 값이 유독 낮은 곳이었는데, 내부순환, 북부간선, 외곽순환 도로가 한꺼번에 맞물려서 엄청난 교통량을 자랑했다. 그 소음과 공해는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을 갖고 있었다. 나는 항상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신혼시절 조용한 일산의 오피스텔을 첫 번째 집으로 삼았다. 오피스텔 뒤로는 낮은 대지에 농사를 짓는 곳들이 보였다. 호수공원까지 자전거를 타거나, 조용한 뒷골목의 카페에서 그림을 그렸다. 시어머니께서는 결혼 전부터도 조금씩 편찮으셨지만, 몇 년 전부터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셨다. 그녀가 유방암과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하면서 병원을 오가기 힘들었던 일산을 떠나 그녀의 집에서 30분 거리의 동네로 이사를 했다. 시골로 오기 전 2-3년은 집안의 차례와 제사도 내 몫이 되었고, 스스로를 돌볼 수 없었던 시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며칠씩 지내다 가시곤 하셨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나도 많이 지쳐가고 있었다. 회사일과 육아로도 벅찬데, 집안의 대소사도 점점 내 몫이 되어갔다. 모두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 나도 견디고 버텨야 하는데 힘이 없었다. 회사일이 많을 때마다 찾아오는 위염과 식도염은 나을 줄 몰랐다. 정말 떠나고 싶었다. 정말 많이 떠나고 싶었다.
슬픈 일이지만, 시어머니께서 요양병원에 들어가신 직후, 우리는 이사를 결심했다. 이제 이 곳을 떠날 수 있었다. 이사를 하자는 결정을 마치고 남편과 나는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를 고민했다. 나는 무조건 서울을 떠나고 싶었다. 사람이 없으면 없을수록 좋았다.
우리는 주말마다 300km를 뛰었다
남편은 예전부터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을 고집했다. 결혼 후 우리는 오피스텔과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았는데, 어릴 때부터 집합주택에 길들여진 나와는 달리, 주택에 오랫동안 살아온 남편은 많은 사람이 함께 사는 아파트 형태를 답답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만의 집을 짓도 싶다는 꿈도 있었다.
집을 지으려면 그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하는 법이지만, 바쁜 직장생활에 육아까지 하고 있는 우리에게 집 짓는 정보를 모으기는 불가능이었다. 그때 남편이 이야기한 것이 ‘타운하우스’였다. 남편 또한 직접 집을 지을 엄두는 나지 않았나 보다.
하자보수는 물론, 보안과 주택 관리까지 곁들여진, 나와 라이프 스타일이 비슷한 이웃들을 한꺼번에 새롭게 만날 수 있는 타운하우스라니, 분명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여러 동네의 타운하우스를 찾았고 주말마다 왕복 300km를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