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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생활자 May 12. 2020

두물머리 앞에서

며칠 아프고 나서 다시 두물머리 걷기를 시작했다. 아침 일찍 두물머리에 가면 동네 주민들 외엔 사람이 없어 더욱 안심이다.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두물머리를 다녀오면 나의 느린 걸음으로 대략 1시간이 걸린다. 걸음수로는 6~7 천보쯤.



마음에 갈증이 난 듯 끝나지 않는 지금의 상태에 조급함이 나서 힘이 쭉 빠지던 날, 해냄 출판사의 SNS에서 봤던 정혜신 tv의 유튜브 채널을 검색했다. ‘나는 왜 자꾸 아픈 걸까, 결국 의지가 약하고 남 탓만 하고 있는 내가 문제인가.’ 아팠던 이유를 알지 못해 괴로웠다.


정혜신 tv의 정혜신 님은 코로나 19를 트라우마 상태로 분류했다. 트라우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강력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발생하는 정신 건강 질환을 말한다. 지금의 우리는 여전히 정신적 충격을 받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나처럼 비자발적 퇴직(또는 무급휴직)을 하게 된 사람들은 일반인보다는 조금 더 강하게 심각한 무기력증이나 우울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


어제 점심 요양병원에서 넉 달만에 외출을 하신 시어머니와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오랜만의 외출이 힘겨우셨던지 시어머니께서 식사 중 갑자기 쓰러지셨다. 소방대원의 도움을 받고 응급처치를 하던 급박한 상황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나의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 때문에 아프신 거 같아. 나랑 같이 밥 먹으러 와서 아프신 거야?’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의 순간에 인간은 가장 쉽게 모든 어려움의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는다. 그래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학대한다. 나약한 나를 책망한다.



우리는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정혜신 님은 ‘나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존엄하다는 것을 인식하며, 존엄한 나를 지키는 것. 지금의 어려움을, 고통을 내 탓으로 여기지 말고 나를 아껴줄 것. 코로나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것은 부질없다. 누구도 코로나 이후의 삶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를 지켜야만 코로나 이후에 나 또한 안녕할 수 있다.


벌써 5월이 되었는데, 여전히 계속해서 하루 종일 아이를 보며 밥을 하는 내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시간은 많은데 더 이상 발전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나를 언제까지 기다려주어야만 하는 걸까 스스로를 닦달했다. 누군가는 괜찮아하는데, 왜 너만 유독 힘들어하느냐고 스스로를 또다시 미워했다.


정혜신 님은 스스로가 자발적인 영역을 확보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일 중요한 시험을 앞둔 사람이 시험공부에 앞서 미뤄뒀던 책상 정리를 하는 이유는 스스로가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자발적 영역을 확보하는 행위라 한다. 그렇게 획득한 자율성이 나를 위로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사회적(생활 속) 거리두기의 강제적인 상황에서 지금의 우리는 달고나 라테를 만들고 ‘아무 놀이 챌린지’를 이어가고 있다.


두물머리 근처는 모두 상수도 보호 구역이라 낚시나 야영,  물놀이 등의 행위가 모두 금지된다. 두물머리를 지나 팔당 댐에 모인 물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상수원이 되기 때문이다. 잘 쓰이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흐르기만 하는 강을 품은, 두물머리 앞에서 생각했다. 아름다운 이 강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흐르기만 하자고. 지금은 그래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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