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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션뷰 Nov 17. 2024

부지런한 사랑

글쓰기란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글 읽는 재미도 깊어졌다. 쓰지 않았을 때는 단순히 독자의 시각으로 보았다면, 이제는 쓰는 사람 입장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 더 깊이 다가오는 문장을 찾고 분석하는 과정이 좋은 예시이다. 특히 슬픔을 애처롭게 표현한 문장들은 어느 책에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슬픔을 풍기는 형용사 하나 없이 담백하게 표현하는 문장이 있다.
예를 들면 이슬아 작가의 “일간 이슬아 - 복희’에 나오는 한 구절이 그렇다.


열아홉 살 때 복희는 국어교사가 되고 싶었고 관련 학과를 갈 수 있을 만큼 성적이 좋았다. 대학 합격 통지서가 복희네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등록금을 낼 돈이 복희네 집엔 한 푼도 없었다.
 어떤 행운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등록금 납부 기한이 지나갔고 복희는 대학생이 되지 못했다. 그날 복희는 소주 세 병을 들고 다락방에 올라가 문을 걸어 잠근 뒤 3일간 나오지 않았다. 3일 뒤 다락에서 내려온 그녀는 비빔밥을 양푼 한가득 비벼 먹고 구직을 시작했다.


이 문장은 슬퍼하는 복희의 모습을 독자에게 디테일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로 따지면 눈물 콧물 다 빼며 세상을 원망하는 주인공 얼굴을 클로즈업하지 않았다. 오히려 복희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복희가 했던 행동만 담담히 묘사할 뿐이다. 그리하여 복희의 슬픔을 독자가 원하는 만큼 상상하게 될 수 있다. 독자의 상상력이 풍부할수록 복희의 슬픔 역시 더 커진다. ‘복희’에서 복희의 슬픔이 중요한 문맥인걸 고려해 보면 아주 과감하고 용감한 문장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특정 개념을 통찰력 있는 짧은 은유로 표현하여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문장도 있다.
 양귀자 작가 소설 “모순”의 한 구절이다.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보장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여러 번 곱씹어본 글이다. 빨간 불이 들어오면 사람들이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듯, 사랑이 시작되면 멈춰서 그 감정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 감정은 매혹적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주저하게 만들고 긴장하게 한다. 사랑의 양면성을 너무 잘 표현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들의 이런 필력은 어떻게 나오는 것일지 생각해 보다가 “부지런한 사랑”이라는 책에서 힌트를 얻었다.

누군가에 애정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을 자꾸 더 알아보고 싶게 된다.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학창 시절엔 어땠고 어떤 사람이었을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꿈은 무엇이며 어떨 때 행복한지 행복할 땐 어떤 표정일지, 슬플 땐 어떻게 이겨내는지 등등을 궁금해하다 보면 그 사람의 본질에 가까워지고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이면까지도 생각하게 된다. 이 마음이 우리를 글 쓰게 하고, 썼던 글을 고치고 또 고치게 하며 풍부한 표현을 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비단 남녀 간 사랑에만 한정되지 않는 것 같다. 양귀자 작가의 글처럼 특정 개념, 감정에도 내 사랑을 주어야 한다. 진실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이슬아 작가의 책 제목 그대로 글쓰기는 부지런한 사랑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


내 직장 상사는 내가 여태껏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똑똑하고 논리적인 사람이자 본받고 싶은 사람이다. 동시에 가장 냉철하고 T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그를 T상사라고 칭하겠다. 언젠가 T상사와 MBTI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T상사가 “나 기분이 안 좋아서 빵집에서 빵하나 샀어”라는 말에 F의 대답이 무엇인지 추측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인 T 인간은 그래도 F가 뭐라고 답하는지 알고는 있을 터인데, “F는 도대체 무슨 답변을 하지?”였다. 과연 F가 0%면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튼 부지런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T상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맡은 일은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고 세상 모든 문제를 다 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그에게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까. 그도 누군가를 치열하게 사랑해 본 이야기가 있겠지. 사랑 앞에 찌질해본 적이 있겠지. 뒤돌아 눈물 흘려본 적이 있겠지. 말 못 할 고민에 밤을 지새운 적이 있겠지. 그도 나름의 고민과 상처가 있겠지. 그에게도 F가 0.001%는 있겠지..  생각하다 보면 어쩐지 마음이 애틋해진다. 글쓰기는 세상을 더 아름답게 비추는 마법일지도 모르겠다.



쓰지 않으면 몰랐을 세상에 내 작은 발 한 걸음을 내디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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