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이 받은 난초 시들어가네? 물 좀 줘야겠다"
"아... 제, 제가 하겠습니다. 부장님"
뚜렷한 용무도 없이 30분이나 자리를 비운 박 부장이 돌아오면서 던진 말에
옆에 앉은 강주임이 후다닥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신경 쓰이면 본인이 직접 하던지,
왜 바쁜 애를 시키고 난리야.
"주임님, 같이 해요"
부장의 주어 없는 화법에 이골이 난 김과장은
이젠 그의 사소한 한마디에도 분노 스위치가 눌리기 직전이라
더 이상의 감정 소모를 막기 위해 막내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몸을 일으켜 상태가 오늘내일하고 있는 호접란을 화장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사람의 보살핌 없이는 자생할 수 없는 난초처럼
후임들에게 자신의 업무를 떠맡기고 사무실 한구석에서 숨만 쉬고 있는 게
박부장이랑 똑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긴 했다.
원래 같이 일했던 부장님께서 A 경쟁사에 임원으로 스카우트된 이후,
책임급 자리가 비워지면 곤란하다며 빨리 채용해 달라는 클라이언트의 컴플레인에
공석을 메꾸고자 팀장님이 급하게 B 경쟁사에서 데려온 16년 차 시니어라 했다.
"나 이제 집에 가볼게~첫 출근이니까 널널해야지"
오후 4시, 그는 팀장이 없는 틈을 타
산뜻한 새 출발이라는 명목으로 다들 한참 일하는 시간에 퇴근을 감행했다.
아직 적응도 안된 새 회사에서, 그것도 첫날부터 호기롭게 무단 퇴근을 갈겨버리는 부장을 보면서
앞으로 그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이차장과 김과장은
'저게 대체 무슨 소리냐'면서 어리둥절했지만
이미 그는 차키를 챙긴 뒤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간 뒤였다.
하지만 그다음 날, 그다음 날도
인수인계와 현황 브리핑은 한 귀로 흘려들으며 주변 맛집이나 물어보던 그는
또다시 오후 4시가 되자 윗선들이 외근인 걸 확인하더니
내일보자는 한 마디를 남기고 유령처럼 사라졌다.
정시에 퇴근하면 차가 막혀서 집에 가는 길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체적으로 시에스타를 가지는 걸 보니
사실 부장의 국적이 그리스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가운데
'뭔가 잘하는 게 있긴 하겠지'라며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그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던 차,
꽤 큰 거래의 계약조건 협의 현황에 대해 보고했다.
그는 보고가 끝나자마자 거래 상대방과 얘기를 해야겠다며 미팅을 잡으라고 했다.
당시 부장의 진면목을 모르던 김과장은
새로운 상사의 업무 스타일을 파악할 좋은 이벤트라며 미팅 일정을 잡았고,
이윽고 미팅 당일 상대방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
왜 말을 안 하지?
부장이 직접 요청한 미팅이라 조용히 그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건만,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책상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 좀 어색한 자리긴 하죠? 날씨도 우중충하고요"
미팅을 청한 우리 쪽의 계속된 침묵에 상대방은 당황해하며 운을 뗐지만
그럼에도 박부장은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결국, 그날 계약조건과 관련된 까다로운 협의는 모두 혼자 진행해야했다.
그 이후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
박부장은 그저 cc에 달린 1인일 뿐 어떠한 역할도, 심지어 조언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역할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가 경력기술서에서 나열했던 화려한 업력은
모두 후임들의 성과를 그대로 베껴 기재한 것일 뿐,
박부장 본인은 그 업무들을 소화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업무능력과 별개로 인턴도 알만한 기초적인 업계 지식을 몰라
나중엔 경력이 겨우 1년 남짓한 팀 막내가 박부장을 붙잡고 알려주기에 이르렀다.
본인 평판에 영향이 가거나 거래처가 끊기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아득바득 소처럼 일하던 김과장은
이 정도 사태에 다다르자 '서빙알바'라는 동료들에게 말 못 할 비밀 외에
또 다른 비밀을 하나 더 만들기로 결심한다.
『박 부장 계약 만료시키기』
리프레쉬를 위한 서빙알바도 좋지만,
당장에 원하는 곳으로 이직을 할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근본적으로 김과장 본인의 번아웃 극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조치였다.
혹자가 그랬던가.
악인에게 애써 복수하려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언젠가 그의 시체가 강물에 떠내려오는 걸 볼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상황 나름이다.
그 강물의 물줄기 하나 정도는 직접 내줘야 빨리 떠내려간다.
그렇지 않으면 시쳇물이 고이다 못해 강물 전체가 썩기도 하는 것이다.
과장이 부장을 어떻게 쫓아내냐 하겠지만, 맞다.
한낱 과장, 그것도 빽도 돈도 없는 일개 직원에게 무슨 힘이 있겠는가.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박부장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다.
그리고 난, 내 인생을 망치러 온 상사가 으레 그런것처럼 숟가락 하나만 얹을 뿐이다.
박부장의 정규직 전환심사까지 7개월이 남은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