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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잡은 루이스 Aug 03. 2021

마침내 사라질 것들 하지만 결국엔 또 살아갈 곳들

결국 무엇인가 새롭게 움트게 될 그곳에서 또 나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정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머리 희끗한 노인으로 점차 나이 들어가는 을지로의 모습. 딱히 이상하지도 않다. 나 역시도 그렇게 나이가 들고 있으니 말이다. 낡긴 했어도 지나치게 사람 냄새 풍기는 이곳이 때로는 감성으로 채워지고 때로는 공사 현장의 쇳소리로 울려 퍼진다. 

이 낡은 거리 위로 새로운 붓칠이 더해지면서 수십 년간 인지하지 못했던 고유한 감성의 본질을 문득 깨닫게 된다. 가본 사람은 안다. 단언컨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환골탈태를 맞이한 을지로는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힙지로라는 모습으로 변화하였고 성수동과 익선동 모두 MZ세대들의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기에 이르렀다. 수천 개의 유리를 가득 쌓아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건물들 아래에서 이 공간들은 오랜 시간 변함없이 터를 닦아왔다. 낡아빠진 공간 위로 수북하게 쌓인 세월의 흔적을 '후~'하고 불고 나니 오롯이 드러나는 앙상함. 툭 건드리면 무너질 듯 위태로운 상처들을 열심히 닦고 기름칠하고 보니 영광스러운 역사의 색채를 가득 품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흙먼지 하나 없는 깔끔한 오피스에 잠시나마 안녕을 고하고 우린 이 공간 속에서 사람들의 흥겨운 냄새에 취하고 엔틱한 감성을 느끼며 재충전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내일 또다시 매너리즘의 챗바퀴로 뛰어들게 되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 털어낸다. 


백년가게 <을지 OB베어>  photo by pen잡은루이스


이른 아침 셔터를 열고 본격적인 일상으로 진입하게 되는 을지로의 수많은 상인들은 이곳을 찾는 손님들과 대화를 하며 분주한 하루를 보낸다. 손님이 없는 한가로운 시간이 찾아오면 바로 옆집 사장님과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햇살이 내리쬐는 청명한 날이나 비대면 시대에 대면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의 하루하루는 무척이나 소중하다. 

높다란 빌딩 어느 사무실 공간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일하는 직장인들 역시 그 작은 네모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또 다른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재택근무에 화상회의가 일상화되면서 비대면이 굳건하게 자리 잡은 사무실의 풍경은 이제 어색하지 않은 그림이 되었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이면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하루를 정리한다. 하루 종일 어깨 위로 쌓였던 짙은 먼지를 털어내며 활짝 열었던 셔터를 굳게 닫는다. 


"아이고 힘들다. 먼저 들어갑니다"

"오늘 소주 한잔 안해?"


을지로 상가를 환하게 밝히던 불빛은 하나둘씩 꺼지지만 그 뒤로 자리한 어느 곳은 또 다른 시작을 맞이한다. 빌딩 숲에서 하나 둘 탈출을 감행하는 직장인들 역시 횡단보도를 가득 채우고 누군가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누군가는 호프 한잔을 위해 을지로 골목으로 향한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을 마무리하는 'OFF의 시간'이지만 누군가는 이들을 맞이하는 'ON의 시간'이다. 


을지로 골목의 흔한 풍경 photo by pen잡은루이스
을지로 골목의 흔한 풍경 photo by pen잡은루이스

수많은 사람들이 가득했던 을지로의 어느 호프집은 이곳을 대표하는 대면의 공간이었다. 노가리의 끄트머리가 검게 타버리면서 수줍게 올라오는 그 연기와 냄새가 맥주의 호프향과 어우러진다. 힘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자리이기도 하고 서로가 힘내자는 위로의 공간이면서 무엇인가 축하를 해주기 위한 기쁨과 환희의 시간이기도 하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만큼 이들이 서로 마주하는 공간 역시 뜨겁게 하루의 마지막을 불태우고 있다. 


"잘 먹었습니다. 내일 뵈어요"

"그래, 들어가. 내일 보자고"


서로 인사를 하고 뿔뿔이 각자의 길로 흩어지면 시끄러웠던 공간을 환하게 비추던 불빛도 새로운 날의 아침을 기약한다. 고단하게 하루를 보냈던 사람들의 축 늘어진 어깨 위로 가로등 불빛이 토닥인다. 힘내라고. 그렇게 아침은 다시 온다. 다시 환하게 햇살이 비추면 우린 또다시 문을 열고 대면의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우리의 삶은 일상의 시작과 마무리를 꾸준히 반복하게 될테니까. 


공간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코로나와 재개발로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100년을 이어갈 줄 알았던 이곳의 평범했던 일상은 이제 정년을 훌쩍 넘어 영원한 은퇴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다. 기존의 것을 허물어 결국엔 자취를 감춰버릴 그 자리에 새로운 것들이 움트며 또다시 살아갈 곳으로 변화하는 것은 매우 아쉽지만 세상의 이치다. 지켜내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릴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지금의 을지로를 힙지로로 만들어낸 것은 아닌지. 오래되어 낡아빠진 골목길 위로 공사 차량들이 먼지를 내며 지나간다. 청계천 위로 크레인이 보이는 풍경이 되었다. 그 아래 존재하는 상가들은 오늘도 여전히 소중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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