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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잡은 루이스 Jan 26. 2022

어렵게 비워냈는데 그걸 또 채운다

어쩌다 보니 미니멀리즘, 지나고 보니 맥시멀리즘

몇 년 전 '직주근접'을 위해 이사를 했다. 방은 전체 3개였지만 평수 자체가 작아 아기자기하게 출발했던 아이방 조차도 그 정체성을 잃어갔다. 아이 침대 위로 비상식량부터 운동기구와 장난감들이 구석구석 자리하게 되었고 옷장 옆으로는 두루마리 화장지부터 지금은 쓰지 않는 접이식 의자까지 놓여있다. 책장은 있지만 꺼내보기도 힘들 정도다. 졸지에 아이는 방을 빼앗겨 거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여기 주말에 치우고 정리 좀 해야겠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정리해보지만 결국 무엇인가 다시 자리를 차지한다. 언젠가 당근마켓에 일부 물건들을 팔기로 하고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인물사진 필터로 예쁘게 찍어 '큰 마음먹고 처분합니다'라며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듯 글을 적어 올렸다. 그렇게 몇 가지는 다른 사람의 손으로 흘러들어 갔다. 당연하지만 몇몇 물건들이 사라진 후 아주 약간이지만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간 몇 번 사용하지도 않던 소품들이나 사놓고도 쓰지 않은 것들 모두 다른 지인들에게 물어가며 선물처럼 쥐어주기도 했다.

 

"혹시 안 쓰는 충전기 있는데 가져갈래?"

"방향제 이거 새거야. 쓸 일 있으면 가져가"

"참, 이건 인센스야. 방 안에서 쓰면 좋을거야"


'12월도 아닌데 산타행세 하는거야?'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렇게 한두개씩 미련을 버려냈고 또 마음을 비워냈다. '어쩌다 보니' 의도하지 않게 미니멀리즘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차지한 것들이 있다.

그동안 미련을 갖고 버리지 못한 것들을 과감하게 비워내는 동안 나이 들어가며 차곡차곡 쌓은 세월의 흔적들은 왜 내게 미련을 두는 것인지. 난 그 미련한 미련 덩어리들을 아주 조금이라도 지워내려 각종 영양제와 화장품들을 소복하게 쌓인 나이만큼 또 쌓아갔다. 평생 한번 먹어보지도 않았던 오메가 3부터 루테인에 멀티비타민, 우루사까지 차례대로 자리를 차지했다. '지나고 보니' 역시 의도하지 않게 맥시멀리즘이 되어버렸다.

 

"대체 하루에 몇 알을 먹어야 하는 거지. 문제없는 걸까?"

어떤 영양제는 하루 2회였고 또 어떤 영양제는 2알씩 복용해야 했다. 당연하지만 걱정이 먼저 앞섰다.

건강해지려는 목적으로 먹다가 자칫 과다 복용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건강검진 후 의사와 상담하면서도 같은 질문을 했다.

"비슷한 효과 같은데 같이 먹어도 되나요? 별 문제없겠죠?"

약국에서 타이레놀 하나 사면서도 똑같은 질문을 이어갔다.

"제가 최근에 영양제를 먹는데 함께 복용해도 되나요?"

그렇게 의사에 약사의 답변까지 받았음에도 비슷하게 보이던 영양제는 한 귀퉁이에 치워두기도 했다.

쓸데없는 미련은 과감하게 버린다고 해놓고선 새로운 걱정을 채우고 있는 중이다. 진정한 영양분은 다른 곳에 있는데 엉뚱한 곳에서 찾아 헤매는 건 아닌지.


어느 날, 회사 선배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오늘도 아이스아메리카노?? 이제 건강 챙겨야  나이야"

"전 이게 좋은데요. 시원하고. 아니 근데 뭐 드세요? 어디 아프세요?"

"이거 다 영양제야"

나와 나이차도 많지 않았던 선배는 눈 건강에 콜레스테롤 줄이기, 혈압약까지 아주 다양한 것들을 스트레스 가득할 서류만큼이나 사무실에 채우며 살고 있었다. 좋든 싫든 나이 드는 것이란 어렵게 비워내고 또 가득 채우는 것인가 보다.  

 

이제 겨우 숨통이 트였는데 서서히 자리를 차지한 영양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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