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en 잡은 루이스 Jul 15. 2024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의 단상


얼마 전 서점에 갔다가 책을 하나 샀다. 그냥 지나쳤으면 빈손으로 나왔을 텐데 그 책에 적힌 <행복한 사람>이라는 평범한 제목이 그날따라 유독 눈에 띄었다. 100페이지도 되지 않을뿐더러 중간중간 삽화가 들어가 있어 실제 본문도 그리 길지 않았다. 굉장히 얇은 이 책은 만원도 되지 않는 시인 나태주 님의 에세이였다. 가격은 단돈 9천 원. 제목 그대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태주 본인의 이야기를 담아서 글을 썼다.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고 자기도 따라서 행복해하는 사람" 


책의 서두부터 행복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게 말이 쉽지. 거기에 나도 따라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한 사람의 정의라고 한다면 나는 어쩌면 때때로 불행한 건가 곱씹어보게 되는데.. 아 현타 오는데. 사실 사람이 매일 매 순간 웃을 순 없다. 헤벌쭉 웃고만 있을 수도 없다. 바보도 아니고 말이지.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며 매 순간을 살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만 매일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내가 만약에 어떤 보고서를 잘 썼거나 일을 잘해서 팀장이 기분 좋았다고 치자. 그렇다고 팀장이 과연 행복해할까? 그가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한 건가? 적당한 예는 아니겠지만 이렇게만 보면 행복한 사람의 대상도 중요한 것 같다. '굳이 내가 왜 팀장을 행복하게 해줘야 하지'라는 생각을 문득. 그런데 그 대상이 우리 가족이라면 또 이야기는 달라진다. 부모님께 갑툭 용돈을 봉투에 넣어서 드렸다고 치자. 기분 좋아하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드리기도 전에 기분이 좋아진다. 봉투를 열고 용돈을 확인하신 부모님이 정말 행복해하신다면 나도 절로 기분 좋아질 테니 행복한 사람이라는 정의에 딱 맞아떨어지는 거 아닌가. 물론 행복이라는 걸 돈으로 살 수도 없지만, 봉투 안에 들어있는 건 '현금'보다 내 진심이라는 걸 부모님은 아실지도. 그래 아실 거다. 용돈보다 손주의 어리광이 더 좋으실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아내와 꽃이 구분 안된다고 말한" 어느 부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화창한 날씨 아래 남편 되는 사람이 카메라를 보며 인터뷰를 했고 마지막 멘트에 흠칫 놀라 남편을 쳐다보는 아내의 모습이 카메라에 그대로 잡힌 적이 있다. 여기서 남편은 "봄이라는 게 느껴지는 날씨에 꽃도 많이 폈고 이런 봄 날씨에 태교 여행하러 (이곳에) 오니 아내랑 꽃이랑 구분이 잘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남편의 멘트도 그렇지만 흠칫 놀란 아내의 귀여운 모습이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때로는 잔혹하고 또 어떨 땐 선정적이고 대다수 자극적인 뉴스 사이에 이런 훈훈한 인터뷰가 나오니 뭔가 되게 따사롭게 느껴졌다. 닭살 돋는 멘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해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당연히 남편 옆에 있던 아내도, 뱃속에서 잠자고 있을 아이도 기분 좋지 않았을까. 따뜻한 말 한마디 혹은 그런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 행복을 선사해 준다는 것이 어쩌면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나태주 시인이 언급한 대로 '정말 행복한 사람'의 정의가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싶다. 나도 행복한 사람이고 싶지만 그전에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니 왜 굳이 여기서 끼어드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