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부산 여자 대구 남자는 낯선 서울에서 소개팅으로 만났다. 늦은 밤, 시간은 흘러가고 얘기는 짙어져가던 순간, 이상하게도 편한 분위기 속에서 남자는 넌지시 여자에게 물어왔고 나즈막한 그 목소리에 여자는 망설임없이 대답을 건네며 웃어보였다.
" 삭막한 서울이라도 좋은 순간은 있잖아요. 희주씨는 어떤 순간의 서울이 좋아요? "
" 저는 퇴근 길 한남대교요. "
*
ㅡ 어디야?
ㅡ 한남대교, 걸어가고 있어.
ㅡ 에이, 오늘 미세먼지 주의보라는데.
ㅡ 날이 좋아서 그래, 볕이 너무 예뻐서.
ㅡ 카페까지 걸어 올 거야?
ㅡ 응, 마감 천천히 해.
ㅡ 뭔가 좀 수상하다.
ㅡ 왜?
ㅡ 너 외로워 하는 거 같아서.
ㅡ 안 그래.
ㅡ 안 그래하는 목소리가 안 그래. ‥조심히 걸어와, 큐브 라떼 만들어 줄게.
ㅡ 응.
정리는 내가할게, 청소만 해줘. 동욱의 말에 직원들은 청소를 하다말고 하나씩 고개를 들었다. 마치 왜요? 라고 하나씩 물어오는 얼굴을 보며 동욱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애인 올거야, 그러니까 다들 20분 내로 퇴근해.
5분을 남겨두고 모두가 퇴근한 카페 안, 희주를 기다리며 큐브라떼 만들기에 열중이던 동욱은 문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왠지 조금은 지친 얼굴로 저를 보며 손을 드는 희주를 보며 동욱은 오늘 제일 맑게 웃어 보였다. 희주의 앞에 맛있는 커피를 놓아주며 마주 앉은 동욱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상황을 가려둔 채 웃으며 물었다.
" 배 안고파? "
" 고파. "
" 뭐 만들어줄까? "
" …이상해. "
" 뭐가? "
" 한남대교만 걸으면 외로운데, 이상하게 그 외로움이 싫지가 않아. "
" 나는 싫은데. "
" 그게 내가 나를 위로하는 방법인가봐. "
" ... . "
" 걸어오면서 생각해봤는데 그런 거 같아. 피한다고 피해봤자 없어질 것도 아니니까, 그냥 이렇게 맞자- 맞고, 털어버리자 하는 그런 마음? "
" ... . "
" 그래도 그 외로운길 걷다보면 이렇게 너 만나잖아, 얼마나 다행이야. "
" 다행인 거 맞아? "
" 그럼. 저녁 뭐 만들어 줄 거야? "
" 베이컨 볶음밥. "
" 맛있겠다! 그럼 설겆이는 내가 할게. "
" 그래, 양보할게. "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동욱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희주는 문득 밀려오는 고마움을 느꼈다. 어쩌면 자극적이게 들렸을 제 말을 듣고도, 캐묻기 대신 맑게 웃어주는 얼굴이 더 없이 따듯하게만 와닿았다. 저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너른 등을 가만보던 희주는 작은 목소리로 제 마음을 꺼내었다.
" 엄마 기일 다가와서 그런가봐. "
" ... . "
" 올해는 나름 다짐했거든. 앞으로 매년 올 날이니까, 이제는 유연하게 넘어가자고. ‥근데 그게 자극이 됐나봐, 오히려 역효과 난 거 같애. "
" ... . "
말 없이 제 앞으로 다가와 서는 동욱을 올려다보던 희주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가득 채워져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 동욱의 앞에선 굳이 참지 않아도 될 눈물임을 느낀 희주의 눈에선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 평생 유연하지 못 할 일이야. 그러니까 혼자 안으려 애쓰지 말고 나한테 덜어내. "
" ... . "
" 아까 마트 갔을 때 자몽 말고 맥주나 잔뜩 사올걸, 자기 좋아하는 복숭아 맥주 패키지로 나왔던데. "
" 사오지. "
" 그럼 장봐서 집에갈까? "
" 만들던 밥은 어쩌고? "
" 담아뒀다가 내일 아침에 먹으면 되지, 가자. "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풀며 안쪽으로 들어 선 동욱은 가방을 챙겨 나오며 희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집 근처 마트에 도착해 카트 하나를 나눠끌며 나란히 장을보다말고 먼저 앞서걷는 희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동욱은 제게 털어내고도 여전히 남아있는 희주의 외로움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 집에 소세지 있어? "
" 얼마 없어, 하나 사. "
" 식빵은? "
" 없어. "
" 감자도 사자, 감자 샐러드 만들어줄게. "
" 응. "
" 또, 또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
" …희주야. "
" 응? "
" 나 오늘 카페 6호점 계약했다. "
" 정말? "
" 응. "
" 잘 됐다! "
저를 보며 잘됐다고 얘길하는 희주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던 동욱은 카트를 끌며 천천히 뒤를 밟았다. 당근도 없지? 뒤돌아 묻는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동욱은 왜인지 지금을 지우려 노력하는 희주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코너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걷는 희주의 뒤를 말없이 따라걷던 동욱은 지금 희주에겐 제 위로보다는 담백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제 말에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는 희주를 보며 동욱은 웃어 보였다. 제 기분에 모가 났을 때면 그저 혼자 참는데에 익숙한 희주를 잘 아는 동욱만의 배려였다.
" 오늘은 자기 말 좀 들으려고? 솔직히 나누기 싫지만 오늘은 좀 나눠가지자, 나 너무 무거워. "
" 어떻게 줄래. 나 이렇게 두 손 모으고 있을까? "
다정한 얼굴로 저를 보며 웃는 동욱의 팔에 팔짱을 낀 희주는 전보다 조금은 가벼워 보였다. 집 앞에 차를 주차하고, 가득 본 장거리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 둘은 근처 공원으로 걸었다. 세상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제일 가까운 친구라고 얘기할 순 있었지만 사사로운 일까지, 낱낱한 감정까지 모두 다 캐치 할 수는 없어 지금의 이 시간이 서로에게 중요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감자샐러드 대신 감자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늘을 이야기하며.
" 아. 6호점 매장은 어디야? "
" 광화문. "
" 어? 우리 회사 옆이네? "
" 그러니까 문제야, 나 이러다 다른 매장은 모른 채 하고 광화문에만 있을까봐. "
" 나야 좋네, 보고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으니까. "
" 이왕 이렇게 된 거 광화문점 매출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는 수 밖에. "
" 그럼 나도 우리 회사 식구들한테 자랑해야겠다, 이 집 커피 맛있다고. "
공기로 번진 대화 속에서 두런 두런 웃음이 번져났다. 곧 엄마 기일이 다가와 저조차도 이길 수 없는 무게를 안은 채 웃고있는 희주가 조금은 안쓰러운 동욱이였다. 어떤말로 기분을 달래줘야하나 티나지않게 고민하던 얼굴 앞으로 희주의 얼굴이 들어섰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 너랑 결혼하려면 돈이 얼마나 더 있어야하나 하는 그런 건설적인 생각? "
" 그래서, 답은 났어? "
" 났다 그러면 나한테 시집 올래? "
" 너 나랑 평생 살 수 있겠어? "
" 그런 말이 어딨어, 내 마음이 확실하니까 너한테 묻는거지. "
" 듣기엔 좋다. "
" 듣기만 좋아? "
" 상상해도 좋아. "
" 이게 상상으로 그칠 일은 아닌데. "
왜인지 제 대답에 서운해하는 동욱의 얼굴이 희주에겐 마냥 귀엽게만 느껴졌다. 대답과 동시에 단숨에 비워 낸 맥주캔을 손으로 뭉게며 아쉬워하는 동욱의 손을 희주는 꼭 잡았다.
" 전에 정혁이가 그러더라, 너한텐 욱이가 딱이야 라고. 그래서 내가 왜? 하고 물으니까 어이없다는 얼굴로 날 보면서 그러는거야. 야. 남들은 봐도 딱 알겠는걸 네가 모르면 어떡하냐- 하면서. "
" 진짜 몰랐어? "
" 설마, 그냥 혁이가 하는 말 들어보려고 그랬던거지. "
" 그래서? "
" 다른 말은 않고 계속 그 말만 하더라, 너한텐 욱이가 딱이야 라고. "
" 그래, 너한텐 내가 딱이야. 나도 알고 남들도 아는데 너는 왜 몰라? …그리고, 나 두고 다른 사람 만나서 어? 지난 연애사, 지난 과거사, 묻어 둔 상처, 지나간 상처 일일히 다 꺼내는것도 일인데, 거기다 확실한 마음까지 서로 주고 받아야 돼. 그걸 언제 다하고 어? 언제 느끼고, 언제 확신받아서 결혼을 하냐? 봐라, 우리 지금 서른인데 마흔? 금방와. "
저도 하고 싶었던 말이였는지 이 참에 무섭게 털어내던 동욱은 희주의 손에서 놀고있던 맥주를 뺏아 단숨에 비워냈다.
" 나 다른 사람 만난다고 안했는데. "
" ... . "
" 나한테 네가 딱인거 나도 아는데. "
" ... . "
" 그리고 마흔- 나 너랑 서른 보낸 것 처럼 마흔도 보낼거야. 그러니까 너 나중에 마음 변했다고 나 차고 그래봐, 지금 네가 한 말 내가 똑같이 해줄테니까. "
" 야, 누가 할 소릴. "
" ... . "
" ... . "
" 근데 우리 왜 싸워? "
" 그래서 나랑 결혼 할 거야? "
" 당연하지. "
" 어? "
" 너랑한다고, 네가 싫다해도 난 너랑 꼭 할 거라고. "
" 진작 좀 해주지, 나 너한테 이런 말 듣고 싶어했던 거 잘 알면서. "
" ... . "
" 나도 가끔은 네가 말하는 확신들 듣고싶고 그래. "
" …엄마 얘기 할 때 마다 나 먼저 생각 해주는 거 너무 고마워. "
" 그 부분은 일일이 고맙다고 얘기 안해도 돼. "
" 왜? "
" 나도 너한테 고맙거든. "
왜 고마워 하는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저를 보는 희주의 손을 꼭 잡은 동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끌었다. 좀 걷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을 좋아하는 동욱이 쉽게 지날 수 없는 오늘이였다. 고맙다가도, 아쉬웠다가도, 서운했다가도, 좋아하는 마음이 서로 뒤엉킨 밤이였지만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아는 서로가 있어 웃음나는 밤이였다.
" 나 내일 아침에 상담있어. "
" 몇시에? "
" 일곱시 반. "
" 그렇게 빨리? "
" 응. 어제 밤에 환자가 연락왔어. 그 왜 손목에 자해한다는 환자 있잖아, 전화와서 내일 상담 아침으로 바꿀 수 있냐고 그러더라고. "
" 아. 밖에서 따로 보는 건 아니지? "
" 무슨 말이야? "
" 난 너 걱정되니까. 혹시나 너한테 감정적으로 행동할까봐. "
" 아니야, 걱정 안해도 돼. 이렇게 앉아서 얘기 나눠보면 환자 의사 나눌 것도 없어. 그들이 내 말에 위로를 받듯이 나도 마찬가지야. …나만 가지고 있을거라 생각했던 그 상처가 나만 가진게 아니란걸 알게되면 마음이 금세 유해지거든, 안도감도 들고. "
" 응. "
" 대화가 별 거 아닌 거 같은데, 절대 별 게 아닌거야. "
" 이렇게 잘 알면서 왜 안하냐? 이렇게 잘 알면서. "
밉지않은 동욱의 잔소리를 들으며 희주는 말없이 웃었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씩 맞춰 걷던 걸음은 어느새 집 앞에 다다랐고, 그제서야 배고프다던 희주의 말이 생각 난 동욱은 다시금 물었다.
" 얼른 들어가서 밥 먹자. "
" 우리 슈퍼가서 컵라면먹자. "
" 편의점 말고? "
" 슈퍼집 평상이 더 좋아, 거기서 먹자. "
" 그래, 가자. "
멀지 않은 거리를 내려가던 둘 사이로 밤바람이 불어왔다. 슈퍼에 들어가 나란히 컵라면 하나씩을 들고서 평상으로 나온 둘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금세 한그릇을 비워내었다. 다먹은 용기를 치우고, 쭈쭈바 두개를 들고선 슈퍼에서 나 온 동욱은 포장 된 아이스크림을 먹기 좋게 뜯어 희주에게 건네며 옆에 누웠다.
나 저기 반짝이는 거 별인 줄 알았어. 어린아이처럼 맑게 웃는 동욱을 보며 희주도 따라 웃었다. 긴장만하며 보냈던 오늘 하루에 불쑥 안도감이 찾아 들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안달내지 않아도, 당연하게 제게 묻는 안도감을 느끼며 희주는 나른해짐을 느꼈다.
" 이상해. "
" 왜 또. "
" 아까는 분명 막막한 기분만 들었는데, 지금은 또 안그래. 몇시간 전만해도 무서웠던 것들이 이제는 안 무섭고, 견딜 수 있을 거 같고 그래. "
" 주치의 하나 잘뒀다 싶지? "
저를 올려다보며 묻는 동욱의 말에 희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함께해 온 긴 시간이 지금을 비추는 듯 했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저를 알고 있는 동욱이 희주는 마냥 고마웠다.
" 나한텐 네가 딱이야. "
" 듣기엔 좋네. "
" 듣기만 좋아? "
" 나한테도 네가 딱이야. "
시계를 보며 몸을 일으킨 동욱은 어느덧 늦어진 시간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가자, 바람 차다. "
" 라면에 아이스크림까지 먹었는데 왜 뭐가 더 먹고싶지? "
" 그럼 가는길에 편의점에서 호빵 먹을까? "
" 좋아! 나 내일 아침에 얼굴 이만큼 붓겠다. 그치? "
" 부으면 어때, 환자랑 얼굴로 얘기할 것도 아닌데. "
" 뭐야? "
" 뭐긴 뭐야 질투지, 여자친구가 아침 댓바람부터 남자랑 둘이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는데. "
" 그게 또 그렇게 되나? "
" 일 잘해, 뭐 내가 말안해도 늘 잘하지만. "
잡고있던 손에 힘을 주며 시선을 맞춘 동욱의 눈빛엔 든든함이 가득했다. 자해하는 환자에게 어떻게 해줘야 따듯함을 느낄까? 동욱을 올려다보던 희주의 두 눈엔 걱정이 묻어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한참을 생각하던 동욱은 담백한 목소리로 얘길했다.
" 지금처럼만 해. "
" 지금처럼? "
" 응. 얘기하면 들어주고, 물어보면 대답하고, 웃어주면 같이웃고. 애써 잘해주려고하면 그게 상대의 눈에 보여서 더 불편해 할 거 같아. "
" …맞아, 그렇겠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희주의 손엔 호빵이, 동욱의 손엔 물병이 들려 있었다. 이런 저런 장난을 주고받던 서로의 얼굴 위로 웃음이 번져가고, 그러다 우연히 고개를 젖힌 희수의 두 눈에 하늘 위 반짝이는 별이 들어섰다.
별! 마주 잡고있던 손을 하늘로 가르키며 얘길하는 희주를 보며 동욱의 고개 또한 젖혀졌다. 예쁘다며 좋아하는 목소리에 절로 웃음이 났다.
" 고개 바로하고 걸어, 다쳐. "
" 서울에서 별이 잘보이니까 신기해, 부산에선 매일 밤마다 봤는데. "
" 그러게 오늘따라 밝네. "
반짝 반짝 작은 별- 아이처럼 노래를 부르는 동욱의 목소리를 들으며 희주는 든든한 팔에 기대었고, 둘은 함께 저문 밤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