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오래보자는 글을 보는 순간 네가 생각이 났다
우리 이렇게 가끔씩 만나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그러자. 티없이 담백하고 덤덤한 윤아의 목소리에 수환은 밥을 먹다말고 멍한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 왜 가끔인데? "
" 매일 그러면 연인 같을 거 같아서. "
" 연인이면 연인이지, 연인 같을건 또 뭐야. "
" 우리 사이에 연인이 말이 돼? "
" 말이 왜 안돼? 우리 사이야 말로 연인으로 번지기에 얼마나 가까운데. 어줍잖게 시간 안 끌어도 돼, 굳이 말안해도 내가 너 다 아는데. 안 그래? "
" 당당하지마. "
" 왜? "
" 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 잘아는 사람 정말 너 하난 거 같아서. "
" 좀 받아들이지? "
" 맥주 마시러 가자. "
" 술 좀 줄이라니까. "
가방을 들고 먼저 일어서는 윤아를 보며 수환은 기다렸단 듯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몇걸음으로 금세 도착한 선술집에 나란히 앉아 마스터에게 맥주 두잔과 꼬지를 주문한 수환은 제 앞에 놓인 완두콩을 까 윤아의 그릇에 담아주었다.
" 이런것도 금지야. "
" 웃기지도 않아, 8년동안 말 없이 다 받아놓곤. "
" 야. "
" 몰래 은행 넣어버릴라. "
" 아- 삶이 너무 퍽퍽하다. "
" 넌 꼭 헤어지면 그 소리 하더라. 이번엔 왜 헤어졌는데? "
" 나랑 결혼하기 싫대. "
" 너 걔한테 결혼하자 그랬어? "
" 안했어. "
" 근데? "
" 뭐겠어, 개소리지. "
" 개, 말 좀 예쁘게 하라니까. "
" 몰라. 짜증나, 불쑥 불쑥 화도나고. "
제 앞에 놓인 맥주를 듬뿍 들이키는 윤아를 보며 수환은 안주로 나온 꼬지를 먹기 좋게 그릇에 발라주었다. 무슨 술을 이렇게 잘 마셔. 꼬지 몇점이 담긴 그릇을 윤아의 앞에 놓아주고선 술이 든 잔을 집던 수환의 시선으로 낯익은 실루엣이 점점 들어섰다. 어디서봤더라, 누구였더라- 하고 말기엔 너무나도 익숙하고 정확한 사람의 실루엣이.
" 저기 나 찬 여자 들어온다. "
" 재 걔 아니야?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
조용히하라며 검지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대는 수환을 보며 윤아는 얼마 안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세상에, 이마에 뭘 얼마나 넣은거야? 하필이면 앉은 자리에서 정면으로, 멀지않게 보이는 그녀를 보며 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의사 집안 둘째 아들이랑 결혼한다 그러더니 그 사람인가? "
" 뭘 궁금해 해, 기면 어쩌고 아니면 어쩌게. "
" 기면 내 자존심이 상할테고, 아니여도 내 자존심이 상하겠지. "
" 왜 상하는데? "
" 딱 봐도 내가 낫지 않아? "
" ... . "
" 아니야? "
티나지않게 남자와 수환을 번갈아보던 윤아는 굳이 비교 않아도 지금 제 옆에 앉은 수환이 더 낫다는 걸 느끼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다 부질없어, 그래봤자 떠난 사람이야. "
" 그래, 나 싫다고 떠난 사람인데. "
" 우리 지금 되게 청승맞다, 남이 보면 웃겠어. "
" 그래, 울진 않겠다. "
" 나는 그 사람이랑 이렇게 될 거라 생각도 못하고 신나서 스키장 예약을 했다? "
" 사랑이 넘실넘실했네. "
" 시원하게 환불하고 그 돈으로 예쁜 구두나 사야지. "
" 지금 환불하면 반도 못 받는 거 아니야? "
" 그렇지, 가는게 낫지. "
" 그럼 뭐하러 환불해, 나랑 가. "
" 싫어. "
" 무슨 대답을 생각도 않고 해. 나랑 가는게 왜 싫은데? "
" 그냥 싫어. "
" 이유가 많지? 그러니까 그냥을 갖다 붙히는거지? "
" 아니야. "
" 아니긴, 얼굴에 다 쓰여있구만. "
마스터, 크림 두잔 더 주세요. 투닥거리는 둘 앞에 방금 만든 스시를 놓아주며 웃던 마스터는 금세 시원한 맥주 두 잔을 가져다 주었다. 한참을 불꽃 튀던 둘의 대화가 조용해지니 자연스레 주변의 대화가 귀로 들어오고 있었다. 매일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회사에서의 스트레스를 털어내는 이야기를 지나 남자이야기, 여자이야기- 가게 안으로 퍼지는 노래 속에 섞인 여러 목소리들을 눈으로 훑던 윤아의 시선은 자연스레 창가 쪽에 앉은 그 여자에게로 향했다.
" 왜 이제야 자기를 만났나 몰라, 그동안 자기 만나기 전의 내 모든 시간이 다 아깝게 느껴져. "
제가 인식을 하고 있어서인지 너무도 적나라하게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비웃던 윤아는 뒤늦게야 제 옆에 앉은 수환을 느끼곤 눈치를 살폈다.
" 취했어? "
" 아니? 왜. "
" 너무 그윽하게 보길래. "
" 죽을래? "
" 다 먹었음 나가자, 내일 출근해야지. "
" 그래, 가자. "
먼저 나간 윤아의 것까지 챙겨 제게 건네는 마스터를 보며 수환은 활짝 웃어보였다. 딸기, 바닐라 뭐? 수환의 손에서 놀고있는 사탕 두개를 진지하게 보던 윤아는 바닐라를 집어 껍질을 깠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공기는 시원했고, 맥주 두 잔에 얼굴이 붉어진 윤아는 온 몸으로 번지는 시원함을 느끼며 웃었다.
" 너 그 여자랑 잘 헤어졌어. "
" ... . "
" 이유 안 물어 봐? "
" 들었구나. "
" 뭘? "
" 그 사람 만나기 전의 모든 시간이 아깝다던 말. "
" 너도 들었어? "
" 네 옆에 나 있었거든, 어떻게 안 들려. "
" 무슨 그런년이 다 있어? 네가 어떻게 했는데. "
" 화내지마, 나 오해한다. "
뭐라 말하려던 윤아는 장난섞인 수환의 목소리에 다른 말 대신 입술을 삐죽였다. 그 때에 나한테도 지금처럼 사랑으로 충실했었어.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기억을 말로 풀어내던 수환의 목소리엔 아쉬움보단 덤덤함이 가득했다.
" 그래서 후회는 없다? "
" 딱히 가질것도 없지, 떠나간 시간이 얼만데. "
" 그래도. 혹시나 후회라는 말이 싫은거면 샘이나 질투라는 말도 있고? "
" 그게 더 싫어. 그리고, 내가 왜 질투를 해? 요리보고 조리봐도 내가 더 낫던데. "
" 야.. 매일같이 치솟는 자존감 인정한다. 너 짱. "
진심어린 표정으로 저를 부러워하는 윤아를 보며 수환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곳곳에 켜진 가로등을 빛삼아 집으로 향하던 둘의 발소리가 서로의 사이에 맴돌듯 들려왔다. 밤의 소리들이 점점 더 선명해지던 순간, 윤아는 조금 아쉬운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채 수환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 다시 올까? "
" 오면, 받아주게? "
" 흔들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다가오면 한번은 흔들릴 거 같기도 하고. "
" 아직 마음이 남았어? 너 싫다고 간 사람인데? "
"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이 나 싫다고 한 시간보다, 사랑한다고 말했던 시간이 더 길었다는 생각. "
" 아까 니가 뭐랬어? 다 부질없다며. "
" 그러니까 문제지, 실컷 다 부질없다고 얘기해놓곤 아쉬워하고 있으니까 얼마나 못났어. "
스스로가 봐도 모난 지금의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윤아였지만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뒤죽박죽 섞여오는 후회와 미련, 그리고 불쑥불쑥 밀려오는 화를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고 느끼는 일 말고는 당장에 윤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일은 좀 어때? 시즌 지나서 여유롭지 않아? "
수환의 말에 윤아는 고개를 저으며 단번에 대답을 건넸다.
" 그래봤자 일주일? 다음 시즌 준비해야지. "
" 징그럽겠다. "
" 매번 이번 시즌이 다라고 말하면서 이러고 사는게 몇년짼지. "
" 그럼 이번에 보겠네. "
" 뭘? "
" 너 사직서 내는 거. "
장난스런 수환의 목소리를 들으며 윤아는 미간을 찌푸렸고, 그 모습을 예상했단듯 금세 긴 손가락이 윤아의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어느새 걷다보니 공원을 두고 서로 엇갈리는 길이 나타났고, 당연하게 윤아를 데려다 주려던 수환과는 다르게 윤아는 인사를 건네며 손을 흔들었다.
" 가. "
" 너나 가. "
" 아니 가자고, 데려다 줄게. "
" 됐어, 혼자 가도 돼. "
대답대신 턱짓으로 가자고 얘길하는 수환을 보며 윤아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큰 걸음으로 걷는 뒤를 쫓았다.
" 왜 사서 고생해. "
" 골목길은 괜히 있는 줄 아냐? 집 옆에 책방 골목, 그 옆에 샛길 하나 있는데 거기로 가면 금방 사거리 나와. 너 몰랐지? "
" 아 진짜? "
" 어, 근데 거기 좁고 위험해. 낮이라도 가지마. "
" 그런데가 있었구나. "
" 가지 말라고, 알고만 있으라고. "
" 근데 넌 거기 어떻게 알아? "
" 너 데려다 주면서 알게 된 거지. "
" 너 진짜 뭐 많이 안다. "
" 그러니까 나 좀 궁금해 해, 니가 알고 있는 내가 다가 아니라고. "
" 끼부리지마. "
" 부리면 받기는 하고? "
" 토스. 나 들어간다, 오늘 고마워. "
" 잘 자라. "
윤아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야 걸음을 뗀 수환의 걸음은 당연하게 골목으로 향했고, 몇 발 걸었을까. 조용하던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알람을 알렸다.
[ 너도 좁은 길로 가지말고 큰 길로 가, 아무리 남자라도 위험한건 위험해. ]
윤아의 문자를 보며 웃던 수환은 고개를 들어 창을 확인했다. 가려진 블라인드 사이로 환한 빛이 방을 비추고 있었고, 아무것도 아닌 풍경 하나에 수환은 몸이 간질거려옴을 느꼈다.
[ 아까 말하지 그랬냐? ]
답장을 기다리며 한 걸음, 두 걸음.
[ 너 우쭐해 할까봐. ]
툴툴 거림이 다인 답장이였지만, 수환은 마치 애정이 담긴 메세지라도 보는 듯 환히 웃었다.
[ 내일 퇴근하고 영화보자. ]
금세 무슨 영화? 라고 물어오는 윤아의 답장을 보며 수환은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ㅡ 어?
ㅡ 손 아파, 그리고 나 혼자가니까 무서워.
ㅡ 무섭긴, 무슨 영환지나 말해봐.
ㅡ 너 싫어하는 SF.
ㅡ 야.
ㅡ 한번은 보자. 그리고 알잖아, 나 꿈이 아이언맨인거.
ㅡ 그건 정말 꿈이다.
ㅡ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 진댔어, 그러니까 너 나한테 잘해라. 어느샌가 이 오빠가 어?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한 길 위를 걸어가면서도, 드문 드문 켜져있는 가로등 빛에 의지해 걸어가면서도, 왜인지 수환은 어둠과 조용한 공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제 귀로 들려오는 윤아의 목소리만 또렷히 느껴질 뿐이였다.
ㅡ 내일 보는거다?
ㅡ 알았어. 집엔 간 거야?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던 수환은 윤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변을 살폈다. 아니 아직, 10분은 더 가야 돼. 밉지 않은 거짓말을 꺼내며 아파트 놀이터로 향한 수환은 혹시나 전화너머로 그네 소리가 들릴까 조심히 자리에 앉았다.
ㅡ 근데 너 스키장 진짜 안 갈거야?
ㅡ 안가, 환불 할 거야.
ㅡ 환불해도 구두 못 사는 거 아니야?
ㅡ 생각해보니까 구두사면 신을 때 마다 그 사람 생각 날 거 같아서, 안 살래.
안 살거라는 말에 힘을 줘 얘기하는 윤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환은 타고 있던 그네에서 발을 떼었다. 그리곤 몸을 젖혀 고개를 하늘로 향한 수환의 눈으로 너른 하늘이 담겨졌다.
ㅡ 무슨 소리야?
ㅡ 나 놀이터야, 그네 타고 있어.
ㅡ 어?
ㅡ 사실 아까 도착했어, 10분 더 가야 된다는 말 거짓말이였어.
ㅡ 야.
ㅡ 하늘 되게 깨끗하다, 달도 없어.
ㅡ 끊어.
ㅡ 잘 자라.
속았다는 기분에 윤아는 망설임없이 전화를 끊었고, 수환은 끊긴 전화를 보며 웃었다. 어릴 적 어느 날 처럼 개구지게 그네를 타며 오늘 하루를 곱씹던 수환의 입술이 자꾸만 씰룩거렸다. 모든게 제 자리로 돌아왔고, 제게도 기회가 생겼다는 걸 느끼게 해 준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