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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May 23. 2016

니가 궁금해

가끔씩 오래보자는 글을 보는 순간 네가 생각이 났다

 우리 이렇게 가끔씩 만나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그러자. 티없이 담백하고 덤덤한 윤아의 목소리에 수환은 밥을 먹다말고 멍한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 왜 가끔인데? "

 " 매일 그러면 연인 같을 거 같아서. "

 " 연인이면 연인이지, 연인 같을건 또 뭐야. "

 " 우리 사이에 연인이 말이 돼? "

 " 말이 왜 안돼? 우리 사이야 말로 연인으로 번지기에 얼마나 가까운데. 어줍잖게 시간 안 끌어도 돼, 굳이 말안해도 내가 너 다 아는데. 안 그래? "

 " 당당하지마. "

 " 왜? "

 " 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 잘아는 사람 정말 너 하난 거 같아서. "

 " 좀 받아들이지? "

 " 맥주 마시러 가자. "

 " 술 좀 줄이라니까. "



 가방을 들고 먼저 일어서는 윤아를 보며 수환은 기다렸단 듯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몇걸음으로 금세 도착한 선술집에 나란히 앉아 마스터에게 맥주 두잔과 꼬지를 주문한 수환은 제 앞에 놓인 완두콩을 까 윤아의 그릇에 담아주었다.



 " 이런것도 금지야. "

 " 웃기지도 않아, 8년동안 말 없이 다 받아놓곤. "

 " 야. "

 " 몰래 은행 넣어버릴라. "

 " 아- 삶이 너무 퍽퍽하다. "

 " 넌 꼭 헤어지면 그 소리 하더라. 이번엔 왜 헤어졌는데? "

 " 나랑 결혼하기 싫대. "

 " 너 걔한테 결혼하자 그랬어? "

 " 안했어. "

 " 근데? "

 " 뭐겠어, 개소리지. "

 " 개, 말 좀 예쁘게 하라니까. "

 " 몰라. 짜증나, 불쑥 불쑥 화도나고. "



 제 앞에 놓인 맥주를 듬뿍 들이키는 윤아를 보며 수환은 안주로 나온 꼬지를 먹기 좋게 그릇에 발라주었다. 무슨 술을 이렇게 잘 마셔. 꼬지 몇점이 담긴 그릇을 윤아의 앞에 놓아주고선 술이 든 잔을 집던 수환의 시선으로 낯익은 실루엣이 점점 들어섰다. 어디서봤더라, 누구였더라- 하고 말기엔 너무나도 익숙하고 정확한 사람의 실루엣이.



 " 저기 나 찬 여자 들어온다. "

 " 재 걔 아니야?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



 조용히하라며 검지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대는 수환을 보며 윤아는 얼마 안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세상에, 이마에 뭘 얼마나 넣은거야? 하필이면 앉은 자리에서 정면으로, 멀지않게 보이는 그녀를 보며 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의사 집안 둘째 아들이랑 결혼한다 그러더니 그 사람인가? "

 " 뭘 궁금해 해, 기면 어쩌고 아니면 어쩌게. "

 " 기면 내 자존심이 상할테고, 아니여도 내 자존심이 상하겠지. "

 " 왜 상하는데? "

 " 딱 봐도 내가 낫지 않아? "

 " ... . "

 " 아니야? "



 티나지않게 남자와 수환을 번갈아보던 윤아는 굳이 비교 않아도 지금 제 옆에 앉은 수환이 더 낫다는 걸 느끼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다 부질없어, 그래봤자 떠난 사람이야. "

 " 그래, 나 싫다고 떠난 사람인데. "

 " 우리 지금 되게 청승맞다, 남이 보면 웃겠어. "

 " 그래, 울진 않겠다. "

 " 나는 그 사람이랑 이렇게 될 거라 생각도 못하고 신나서 스키장 예약을 했다? "

 " 사랑이 넘실넘실했네. "

 " 시원하게 환불하고 그 돈으로 예쁜 구두나 사야지. "

 " 지금 환불하면 반도 못 받는 거 아니야? "

 " 그렇지, 가는게 낫지. "

 " 그럼 뭐하러 환불해, 나랑 가. "

 " 싫어. "

 " 무슨 대답을 생각도 않고 해. 나랑 가는게 왜 싫은데? "

 " 그냥 싫어. "

 " 이유가 많지? 그러니까 그냥을 갖다 붙히는거지? "

 " 아니야. "

 " 아니긴, 얼굴에 다 쓰여있구만. "



 마스터, 크림 두잔 더 주세요. 투닥거리는 둘 앞에 방금 만든 스시를 놓아주며 웃던 마스터는 금세 시원한 맥주 두 잔을 가져다 주었다. 한참을 불꽃 튀던 둘의 대화가 조용해지니 자연스레 주변의 대화가 귀로 들어오고 있었다. 매일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회사에서의 스트레스를 털어내는 이야기를 지나 남자이야기, 여자이야기- 가게 안으로 퍼지는 노래 속에 섞인 여러 목소리들을 눈으로 훑던 윤아의 시선은 자연스레 창가 쪽에 앉은 그 여자에게로 향했다.



 " 왜 이제야 자기를 만났나 몰라, 그동안 자기 만나기 전의 내 모든 시간이 다 아깝게 느껴져. "



 제가 인식을 하고 있어서인지 너무도 적나라하게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비웃던 윤아는 뒤늦게야 제 옆에 앉은 수환을 느끼곤 눈치를 살폈다.



 " 취했어? "

 " 아니? 왜. "

 " 너무 그윽하게 보길래. "

 " 죽을래? "

 " 다 먹었음 나가자, 내일 출근해야지. "

 " 그래, 가자. "



 먼저 나간 윤아의 것까지 챙겨 제게 건네는 마스터를 보며 수환은 활짝 웃어보였다. 딸기, 바닐라 뭐? 수환의 손에서 놀고있는 사탕 두개를 진지하게 보던 윤아는 바닐라를 집어 껍질을 깠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공기는 시원했고, 맥주 두 잔에 얼굴이 붉어진 윤아는 온 몸으로 번지는 시원함을 느끼며 웃었다.



 " 너 그 여자랑 잘 헤어졌어. "

 " ... . "

 " 이유 안 물어 봐? "

 " 들었구나. "

 " 뭘? "

 " 그 사람 만나기 전의 모든 시간이 아깝다던 말. "

 " 너도 들었어? "

 " 네 옆에 나 있었거든, 어떻게 안 들려. "

 " 무슨 그런년이 다 있어? 네가 어떻게 했는데. "

 " 화내지마, 나 오해한다. "



 뭐라 말하려던 윤아는 장난섞인 수환의 목소리에 다른 말 대신 입술을 삐죽였다. 그 때에 나한테도 지금처럼 사랑으로 충실했었어.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기억을 말로 풀어내던 수환의 목소리엔 아쉬움보단 덤덤함이 가득했다.



 " 그래서 후회는 없다? "

 " 딱히 가질것도 없지, 떠나간 시간이 얼만데. "

 " 그래도. 혹시나 후회라는 말이 싫은거면 샘이나 질투라는 말도 있고? "

 " 그게 더 싫어. 그리고, 내가 왜 질투를 해? 요리보고 조리봐도 내가 더 낫던데. "

 " 야.. 매일같이 치솟는 자존감 인정한다. 너 짱. "



 진심어린 표정으로 저를 부러워하는 윤아를 보며 수환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곳곳에 켜진 가로등을 빛삼아 집으로 향하던 둘의 발소리가 서로의 사이에 맴돌듯 들려왔다. 밤의 소리들이 점점 더 선명해지던 순간, 윤아는 조금 아쉬운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채 수환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 다시 올까? "

 " 오면, 받아주게? "

 " 흔들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다가오면 한번은 흔들릴 거 같기도 하고. "

 " 아직 마음이 남았어? 너 싫다고 간 사람인데? "

 "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이 나 싫다고 한 시간보다, 사랑한다고 말했던 시간이 더 길었다는 생각. "

 " 아까 니가 뭐랬어? 다 부질없다며. "

 " 그러니까 문제지, 실컷 다 부질없다고 얘기해놓곤 아쉬워하고 있으니까 얼마나 못났어. "



 스스로가 봐도 모난 지금의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윤아였지만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뒤죽박죽 섞여오는 후회와 미련, 그리고 불쑥불쑥 밀려오는 화를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고 느끼는 일 말고는 당장에 윤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일은 좀 어때? 시즌 지나서 여유롭지 않아? "



 수환의 말에 윤아는 고개를 저으며 단번에 대답을 건넸다.



 " 그래봤자 일주일? 다음 시즌 준비해야지. "

 " 징그럽겠다. "

 " 매번 이번 시즌이 다라고 말하면서 이러고 사는게 몇년짼지. "

 " 그럼 이번에 보겠네. "

 " 뭘? "

 " 너 사직서 내는 거. "



 장난스런 수환의 목소리를 들으며 윤아는 미간을 찌푸렸고, 그 모습을 예상했단듯 금세 긴 손가락이 윤아의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어느새 걷다보니 공원을 두고 서로 엇갈리는 길이 나타났고, 당연하게 윤아를 데려다 주려던 수환과는 다르게 윤아는 인사를 건네며 손을 흔들었다.



 " 가. "

 " 너나 가. "

 " 아니 가자고, 데려다 줄게. "

 " 됐어, 혼자 가도 돼. "



 대답대신 턱짓으로 가자고 얘길하는 수환을 보며 윤아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큰 걸음으로 걷는 뒤를 쫓았다.



 " 왜 사서 고생해. "

 " 골목길은 괜히 있는 줄 아냐? 집 옆에 책방 골목, 그 옆에 샛길 하나 있는데 거기로 가면 금방 사거리 나와. 너 몰랐지? "

 " 아 진짜? "

 " 어, 근데 거기 좁고 위험해. 낮이라도 가지마. "

 " 그런데가 있었구나. "

 " 가지 말라고, 알고만 있으라고. "

 " 근데 넌 거기 어떻게 알아? "

 " 너 데려다 주면서 알게 된 거지. "

 " 너 진짜 뭐 많이 안다. "

 " 그러니까 나 좀 궁금해 해, 니가 알고 있는 내가 다가 아니라고. "

 " 끼부리지마. "

 " 부리면 받기는 하고? "

 " 토스. 나 들어간다, 오늘 고마워. "

 " 잘 자라. "



 윤아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야 걸음을 뗀 수환의 걸음은 당연하게 골목으로 향했고, 몇 발 걸었을까. 조용하던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알람을 알렸다.



 [ 너도 좁은 길로 가지말고 큰 길로 가, 아무리 남자라도 위험한건 위험해. ]



 윤아의 문자를 보며 웃던 수환은 고개를 들어 창을 확인했다. 가려진 블라인드 사이로 환한 빛이 방을 비추고 있었고, 아무것도 아닌 풍경 하나에 수환은 몸이 간질거려옴을 느꼈다.



 [ 아까 말하지 그랬냐? ]



 답장을 기다리며 한 걸음, 두 걸음.



 [ 너 우쭐해 할까봐. ]



 툴툴 거림이 다인 답장이였지만, 수환은 마치 애정이 담긴 메세지라도 보는 듯 환히 웃었다.



 [ 내일 퇴근하고 영화보자. ]



 금세 무슨 영화? 라고 물어오는 윤아의 답장을 보며 수환은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ㅡ 어?

 ㅡ 손 아파, 그리고 나 혼자가니까 무서워.

 ㅡ 무섭긴, 무슨 영환지나 말해봐.

 ㅡ 너 싫어하는 SF.

 ㅡ 야.

 ㅡ 한번은 보자. 그리고 알잖아, 나 꿈이 아이언맨인거.

 ㅡ 그건 정말 꿈이다.

 ㅡ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 진댔어, 그러니까 너 나한테 잘해라. 어느샌가 이 오빠가 어?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한 길 위를 걸어가면서도, 드문 드문 켜져있는 가로등 빛에 의지해 걸어가면서도, 왜인지 수환은 어둠과 조용한 공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제 귀로 들려오는 윤아의 목소리만 또렷히 느껴질 뿐이였다.



 ㅡ 내일 보는거다?

 ㅡ 알았어. 집엔 간 거야?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던 수환은 윤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변을 살폈다. 아니 아직, 10분은 더 가야 돼. 밉지 않은 거짓말을 꺼내며 아파트 놀이터로 향한 수환은 혹시나 전화너머로 그네 소리가 들릴까 조심히 자리에 앉았다.



 ㅡ 근데 너 스키장 진짜 안 갈거야?

 ㅡ 안가, 환불 할 거야.

 ㅡ 환불해도 구두 못 사는 거 아니야?

 ㅡ 생각해보니까 구두사면 신을 때 마다 그 사람 생각 날 거 같아서, 안 살래.



 안 살거라는 말에 힘을 줘 얘기하는 윤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환은 타고 있던 그네에서 발을 떼었다. 그리곤 몸을 젖혀 고개를 하늘로 향한 수환의 눈으로 너른 하늘이 담겨졌다.



 ㅡ 무슨 소리야?

 ㅡ 나 놀이터야, 그네 타고 있어.

 ㅡ 어?

 ㅡ 사실 아까 도착했어, 10분 더 가야 된다는 말 거짓말이였어.

 ㅡ 야.

 ㅡ 하늘 되게 깨끗하다, 달도 없어.

 ㅡ 끊어.

 ㅡ 잘 자라.



 속았다는 기분에 윤아는 망설임없이 전화를 끊었고, 수환은 끊긴 전화를 보며 웃었다. 어릴 적 어느 날 처럼 개구지게 그네를 타며 오늘 하루를 곱씹던 수환의 입술이 자꾸만 씰룩거렸다. 모든게 제 자리로 돌아왔고, 제게도 기회가 생겼다는 걸 느끼게 해 준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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