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준비하며 회사를 나서던 예진은 가방 깊숙이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멈춰 서 핸드폰을 찾았다. 허둥지둥 거리던 손으로 이내 핸드폰을 집은 예진은 화면 위로 떠오른 원재의 이름을 보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 어, 왜. "
" 너 어디야. 퇴근했어? "
" 하는 길. "
" 그럼 나 좀 데리러 와. "
" 아 왜, 싫어. "
" 앞으로 나 부르기만 해라. "
" 뭔데. 무슨 일 인데? "
" 나 오늘 까여도 너무 까여서 미세먼지가 친구하자 할 판이야. "
" 참나. "
한껏 지친 원재의 목소리를 들으며 차에 올라 탄 예진은 거치대에 핸드폰을 올려놓곤 벨트를 맸다.
" 갈게, 전화하면 내려와. "
" 밥 살까? "
" 더워서 입맛도 없어. "
" 뻥치고 있네. "
" 진짜야. "
" 우리 회사 밑에 네가 좋아하는 쥬스바 있잖아. 그건? "
" 좋아. "
" 파인애플 쥬스에 비타민 가루 추가? "
" 어, 나 지금 가. "
시동버튼을 누른 예진은 알았다고 대답하는 원재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차장을 벗어났다. 지금처럼 서로가 필요한 순간이면 회사가 가까운게 천만으로 다행이였다. 한참 퇴근길에 막혀 있을 도로를 피해 골목길로만 빠져나가던 예진은 저멀리 보이는 원재의 회사를 보며 신호를 받은 틈을 타 통화버튼을 눌렀다.
" 어. "
" 나 신호 대기 중, 횡단보도 앞에 서 있어. "
" 응, 갈게. "
전화를 끊은 예진은 사거리에 붙잡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리던 차, 옆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절로 시선이 닿았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여러 사람들을 보며 따분한 시간을 보내던 차, 제 차를 알아보곤 걸어오는 원재를 보며 예진은 의아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가만 서 있어도 갈 건데 굳이 제 발로 찾아오니 의아함이 생겨난 것 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의아해하는 예진을 보며 마시고 있던 주스가 담긴 컵을 흔들며 웃었다. 신호가 너무 길어- 라고 얘길하며.
평소 저하고 있을 때와는 다르게 말끔한 원재의 모습을 보며 예진은 새삼스레 제 시선이 달라짐을 느꼈다. 한발, 한발 점점 더 가까워 올 수록 새롭게 느껴지는 모습만 보일 때 쯤, 양 손에 쥐고있는 컵 때문에 문을 열지 못하는 원재를 보며 예진은 손을 뻗었다.
" 너 좀 멍하다? "
들고있던 컵을 건네며 웃은 원재는 앞으로 당겨진 의자를 쉽게 뒤로 밀며 다리를 뻗었다. 너 오늘 안왔으면 나 섭섭할 뻔 했다. 벨트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지막히 웃던 예진은 바뀐 신호를 보며 차를 출발시켰다.
길었다 오늘. 원재의 한숨에 예진은 저 또한 그랬던 하루였음을 느끼며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 근데 왜 까였어? "
" 제작비 예산 초과해서. "
" 까일만 했네. "
" 위로냐? "
" ... . "
" 잘하고 싶었어, 너무 잘하고 싶어서. "
" 대본은, 잘 나오고 있어? "
" 그럼! 우리 채작가 어제 탈고했어. "
" 진짜? 대박! "
" 것봐, 이러니 내가 욕심이 생기지. 작가가 어마어마하게 써 준 스토리 내가 어마어마하게 살려야하는데, 무슨 놈의 제한이 그렇게도 많은지. 매 순간이 빨간불이야, 가지도 못해. "
" 처량하다 유원재. "
" 나 올해 꼭 대박나야 하는데. "
" 그 놈의 대박은. "
" 집 근처 포장마차가서 꼼장어에 소주 한잔이나 하자. "
" 진짜 별로야? "
" 어. "
단호하게 대답을 하며 두 손으로 눈꼬리를 내린 원재를 보며 예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집 앞에 도착해 차를 주차하고, 오늘 하루 저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투피스 대신 먹을 장전을 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곤 쌩하게 사라지는 예진을 보며 원재는 먼저 들어가 주문을 시켰다.
어지간하면 그 티는 좀 버려라. 주문한 꼼장어가 나올 때 쯤, 저를 알고지낸 4년 전 부터 주구장창 입고있는 늘어진 티를 보며 원재는 고개를 저었다.
" 나만의 잇 아이템이야. "
" 잇 아이템 좋아하시네, 늘어질대로 다 늘어졌구만. 이 오빠가 잇 아이템으로다가 하나 사줘? "
" 됐거든. "
예진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던 원재는 술을 받기위해 병을 건네다 무언가 생각난 듯 손을 거두었고, 예진은 허공에서 놀고있는 제 손을 보며 의아해했다.
" 뭐야, 왜 니가 따라. "
" 나도 손이 있으니까. "
" 나는 뭐 손이 없어? "
" 내가 따르면 어때, 어차피 내 입으로 들어갈 거. "
" 그러면 앞에 있는 사람이 재수없다잖아. "
" 흘러가는 말을 그렇게 믿을거면 차라리 내 말을 다 믿어. "
" 너는 전적이 너무 많아서 안돼. "
그러며 단숨에 잔을 비워내는 예진을 보며 따라 잔을 비워 낸 원재는 방금 전과 같이 예진의 잔을 채워주며 제 잔 또한 채웠다.
" 아-! "
" 내가 이상해서 그래, 여자가 왜 술을 따라. "
" 엉? "
" 됐어. 또 이거가지고 토 달지마, 지극히 내 취향이니까 존중하고 넘어가. "
단호하게 얘길하던 원재는 순식간에 화제를 돌려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둘씩 꺼내놓았다. 같은 업계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서로의 고충은 서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진지한 대화와 우스운 대화가 오고가며 시간이 깊어지던 차, 시계를 확인하던 원재는 열시 반이 훌쩍 넘은 바늘을 보며 잔에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 가자, 내일 출근해야지. "
" 출근, 아- 안하고 싶다. "
" 너도? 나도. "
예진의 말에 동조하던 원재는 아이처럼 웃어보이고는 먼저 일어났다. 아이스크림 먹을까? 술을 먹은 후면 꼭 아이스크림을 찾는 예진을 알고선 묻던 원재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편의점으로 들어섰고, 이내 쭈쭈바 하나와 막대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들고선 나왔다.
술 좀 깨고 가자. 아이스크림 껍질을 벗겨 예진의 입에 물려주던 원재는 밤이 묻은 공원을 가르켰고, 예진은 밤바람 좋지- 라며 따라 걸었다. 온전히 가로등 불빛에 의존하여 걷는 밤은, 불빛에 물든 강을 보며 걷는 밤은, 참으로 달콤했다. 한동안 말없이 아이스크림만 먹던 예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원재는 고개를 돌려 입에 물려있는 빈 막대를 빼내었다. 다먹었음 좀 물고 있지마. 그러며 가까운 거리에 놓인 쓰레기통에 막대를 버린 원재는 오늘 제 부름에 달려와줬던 예진을 보며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 오늘은 진짜 집에가기 싫드라. "
" 그런 날이 있지. "
" 회사도 날 미워하고, 떠나간 연인도 내가 밉다 하고. "
" 또 연락왔어? "
" 어. 야, 말 나온김에 묻자. 헤어진 마당에, 다짜고짜 전화와서 내가 밉다고 소리치는 건 뭐냐? "
" 진짜 그래? "
" 진짜 그래. "
원재의 말에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던 예진은 정말이지 궁금하다는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얼굴을 보며 고개를 어깨를 으쓱였다. 뭐겠어, 생각할수록 네가 미운거지. 쿨하게 흩어진 예진의 말에 원재는 가던 길을 멈춰섰다.
"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
" 그런 걔는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
" 어? "
" 다 받아들이기 나름이야. "
" ... . "
잊고 말아. 스스로 상처 만들지 말고, 다 지나갈 일이야. 원재의 입에 물려있던 쭈쭈바를 빼 쓰레기통에 넣은 예진은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는 원재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걸음을 빨리했다.
" 뭘 그렇게 급하게 가! "
" 졸려. "
" 아니 근데, 내가 상처 받을건 어떻게 알았는데? "
어느새 옆으로 쫓아와 뒤로 걸으며 제게 묻는 원재를 보며 예진은 모르는 척 앞만 보고 걸었다. 제가 그러면 그럴수록 더 집요하게 물어오는 원재라는 걸 알았지만 예진은 그 또한 싫지 않았다.
여름 밤, 살랑 살랑 불어오는 바람처럼 예진의 마음에도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아니 어떻게 알았냐고-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집요하게 물어오는 원재를 한순간 마주 할 자신이 없어진 예진은 전과는 달리 빠른 걸음으로 뛰었고, 그를 뒤쫓던 원재는 느려진 저로 인해 금세 멀어진 둘의 사이를 바라보며 웃었다가 또 웃기를 반복했다.
같이 가자! 제 목소리에 저만치 멀어졌던 예진이 뒤를 돌아보았고, 원재는 그 틈을 타 힘껏 달려갔다. 갑작스레 뛰는 저로 인해 다시금 걸음을 재촉하던 예진이였지만, 단숨에 저를 따라잡은 원재를 이길리 만무했다.
" 너네 회사에 피디 안 구하냐? 얼굴 되고 키되고 능력도 되는데. "
" 안 구해. "
" 대표님한테 어필 좀 해봐. "
" 앞이나 보고 걸어. "
" 네가 잘 보고 말해주면 되지. "
" 됐거든. 그리고 우린 잘생긴 피디만 뽑거든. "
" 야. 내가 어디가서 미모로, "
" 뒤에 돌. "
제 말을 가로 막은 예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원재는 베시시 웃었고, 예진은 애써 제 감정을 숨기며 걸었다. 것봐- 마치 저를 알고 있었다는듯 얘길하는 목소리를 들에 예진은 주먹을 들어보이곤 다시금 속력을 냈다.
" 오늘 킵이다. "
" 킵? "
" 나도 언제든지 너 부른다고. "
" 언제든지. "
" 그래, 언제든지. "
" 그거 묘하네, 언제든지. "
다시 또 시작 된 늘어짐에 예진은 냅다 뛰었고, 원재는 쉽게 그 뒤를 쫓아왔다. 서로를 알고, 함께했던 시간들이 어느덧 믿음으로 변해감을 느꼈던 여름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