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y Mar 05. 2016

you & me

첫 번째 이야기

 벌써 며칠 째 인지 셀 수도 없다. 수없이 이어진 작업에 세원은 이미 녹초가 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보내야 할 서류를 메일로 발송함과 동시에 노트북을 닫고 테이블 위로 발을 뻗은 세원은 대충 담요를 펼쳐 몸을 덮었다. 요란스레 내리던 비는 여전했고 새벽 두시가 넘은 시간, JCUS 잡지사 사옥의 불은 오늘도 ON 이였다.



 선, 팀실로 들어서던 용국은 어느새 잠이 든 세원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발걸음은 절로 조심스러워졌고, 테이블에 올려 놓은 포장된 죽을 보며 용국은 세원을 깨워야하나 말아야하나 긴 고민을 시작했다. 옆 자리에 놓인 의자에 살며시 앉은 용국은 본의 아니게 자고있는 세원을 염탐하는 꼴이 되었다. 늘 보는 모습 중, 지금 이 모습이 제일 조용하고 예뻤던 탓에 이렇게 가만히 앉아 보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지만 그랬다간 새벽의 감성에 이성을 잃기 딱 좋을 거 같았다. 다행히 아직 날라가지 않은 이성이 용국을 간지럽혔다. 막 끓인 죽이 혹시나 식을까 헐레벌떡 뛰어왔던게 아깝지도 않냐고.



 ㅡ 선배.
 ㅡ ... .
 ㅡ 선배, 죽 사왔습니다. 한그릇 드시고 주무세요.



 낮은 용국의 목소리에 세원은 눈을 떴다. 이미 얼굴 가득 묻은 잠은 세원을 힘들게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문제가 하나도 아닌 여러개였다. 잠이 오는데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픈데 먹는것도 귀찮은 상황, 지금이 딱 지랄맞은 그 상황이였다.


 ㅡ 내꺼만 사온거야?
 ㅡ 아뇨, 제 것도 있습니다. 얼른 드시고 숙직실 가서 주무세요.
 ㅡ ..어, 먹자.


 이미 잠에 취해 죽을 먹는건지 입에 묻히는건지 알 수 없는 세원을 보며 용국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 중 이였다. 아무 말 없이 죽 한그릇을 금세 비워 낸 세원은 주변을 살폈고, 그런 그녀의 행동이 물을 찾는 것이란 걸 알아챈 용국은 제 다리 옆에 놓아 두었던 생수를 까 세원에게 건넸다.



 선배, 여기 묻었어요. 제 입술을 가르키며 휴지를 건네던 용국은 고개만 끄덕인 채 가만히 있는 세원을 보며 눈만 깜빡였다. 안 닦으시면 제가 닦습니다. 다시금 낮은 목소리가 세원의 귓가에 울리고, 알겠다며 티슈를 받아 들곤 대충 입을 닦고선 제게 묻는 세원을 보며 용국은 못마땅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ㅡ 너도 일 많냐?
 ㅡ 아니요, 딱히.


 제게 묻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용국의 시선은 여전히 세원의 입술에 고정 되어 있었다.


 ㅡ 근데 왜 여깄어, 퇴근 안해?
 ㅡ 하기 싫어서 안했습니다.


 퇴근을 안한 이유가 선배 때문이라고 말하면 곧 매타작이 시작 될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용국은 돌려 말하는 대신, 시선은 세원을 향해 있었다.


 ㅡ 회사생활 7년만에 퇴근이 하기 싫어 안했다는 말은 또 처음 들어보네. 야, 이 일이 너랑 잘 맞나보다.


 세원의 말에 다시 또 용국의 마음 속에선 진심이 뒤엉켰다. 일 보다는 선배랑 잘 맞고 싶어서 이렇게 매일 알짱거린다고 말이다.



 ㅡ 너 있는 줄 알았으면 아까 B컷 작업 같이,



 얘기 중이던 세원의 입술 위로 용국의 손이 닿았다 떨어졌다. 놀라 그대로 굳은 세원을 보며 용국은 능청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ㅡ 아까 말씀드렸는데, 안 닦으시면 제가 닦는다고.
ㅡ 야.
ㅡ 여기 이렇게 묻어 있지 않습니까. 몇번이나 눈치를 줬는데도 모르시고, 아. 이번 일은 정강이 까일 일 아닌거 아시죠?
ㅡ 야,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때리는 줄 알겠다.
ㅡ 맞으면서.
ㅡ 난 이거 먹고 퇴근할테니까 넌 조용한 사무실에서, 잘 맞는 일이나 해.
ㅡ 차 가지고 오셨어요?
ㅡ 아니. 택시 타고 가면,
ㅡ 이 새벽에 택시가 더 위험해요. 같이 가요, 데려다 드릴게요.
ㅡ 건 두시간 거리를? 됐어.
ㅡ 가요.


 세원의 말은 묵살한 채 의자 위에 걸쳐 둔 가디건을 집어 든 용국은 우두커니 서서 저를 보고 있는 세원의 가방과 재킷을 대신해 들었다.



 어찌저찌 하다보니 세원은 용국의 차에 올라 타 있었다. 출발 전, 선배, 벨트요. 라고 콕 찝어 말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세원은 출발하는 차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굴곡진 주차장을 어려움 없이 나서던 차는 어느새 교차로로 진입했고, 이곳 저곳으로 시선을 두던 세원은 용국이 벨트를 매지 않은 걸 보고선 한마디를 건네다 말곤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ㅡ 너 벨,


 막 달리기 시작하며 가볍게 벨트를 끌어매던 용국은 세원을 쳐다보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세시에 가까워진 시간, 이미 늦은 시간인지라 도로 위는 한산했고, 신호 조차 막힘 없었다.


ㅡ 아무래도 너무 멀어. 그냥 나 근처 정류,
ㅡ 선배.
ㅡ 어?
ㅡ 안 잡아 먹어요, 그냥 가요.
ㅡ 야! 잡아 먹긴 누가, 난 너 피곤할까봐 그러지.
ㅡ 안 피곤합니다. 알아서 잘 모셔다 드릴게요.
ㅡ 너 우리 집 알아?
ㅡ 모를리가요. 두 달 전에 회식할 때, 선배 거하게 취하셔서 철진 선배랑 저랑 나란히 데려다 드렸었는데, 기억 안나세요?
ㅡ 아... .
ㅡ 그러니까 걱정말고 주무세요. 잡아 먹지도 않고, 길 헤맬 일도 없으니까요.


 말하는 족족 받아칠 수 없는 말만 하는 용국의 옆모습을 가만 보던 세원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마치 좋아하는 사람을 몰래 훔쳐보다 걸린 것 처럼. 그런 세원의 행동에 용국의 얼굴엔 기분좋은 웃음이 피었지만, 지금 이 순간 시선을 회피하기 바쁜 세원은 알리 만무했다.


 막힘없이 달리던 차가 신호에 걸리고, 그 틈에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던 용국은 제게 물어오는 세원의 목소리에 시선을 맞췄다.


ㅡ 국.
ㅡ 네.
ㅡ 넌 왜 연애 안하냐? 누가봐도 여자들이 딱 좋아 할 상인데.
ㅡ 그럼 뭐합니까, 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저를 안 좋아하는데.
ㅡ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ㅡ 네, 오래 좋아 했어요.
ㅡ 얘가 또 안 그렇게 생겨서 순정파네. 친구야?
ㅡ 아니요, 친구는 아니고.. . 누나?
ㅡ 좋아한다고 말은 해봤어?
ㅡ 아니요. 대신 매일 티를 내는데, 매일 모르는 거 같아요.
ㅡ 누가, 누나가?
ㅡ 네, 누나가요.



 용국이 힘주어 말하는 누나가 저일거라곤 일말의 의심조차 않은 채, 제 일인듯 아쉬워하는 세원을 보고 있자니 용국은 이 상황이 재밌기만 했다.


ㅡ 오래 알고 지냈어?
ㅡ 2년 정도 알고 지냈어요.
ㅡ 오래 알았네. 근데 그렇게 표현을 하는데도 모르면 차라리 고백을 해. 너 안 답답해?
ㅡ 답답하죠, 근데 그것도 나름 좋아요.
ㅡ 뭐가 좋아?
ㅡ 제가 직설적으로 표현할때마다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는데 그게 또 그렇게 귀엽거든요. 또, 누나랍시고 눈에 힘주고 무섭게 말하려고 할 때마다 진짜 귀여워 죽을 거 같아요.
ㅡ 야, 국이 너한테 이런면이 있는 줄 몰랐네. 그 누나랑 잘됐으면 좋겠다.
ㅡ 어떻게 해야 잘 될까요, 선배라면 남자가 어떻게 다가왔으면 좋겠어요?
ㅡ 난 그냥 덤덤하게, 좋아한다고.
ㅡ ... .
ㅡ 근데 이건 내 취향이고, 넌 그 누나 취향을 알아야지.
ㅡ 선배 말이 맞는 거 같습니다.
ㅡ 뭐가?
ㅡ 덤덤하게 좋아한다고 말하는거요.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고.
ㅡ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원이 귀여웠는지 입가로 번지던 용국의 웃음은 한참동안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막힘없이 달린탓에 평균 퇴근시간에서 30분이 단축되었지만, 아직 30분은 더 가야했다. 새벽 빛이 시선을 두는 곳곳마다 피어 있었고, 애써 잠을 참으려는 듯 노력하던 세원은 이따금씩 밀려오는 하품 앞에선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ㅡ 주무세요, 선배.
ㅡ 다왔는데 뭐, 지금 자면 이따 집에가서 잠 못자.
ㅡ 어차피 내일 주말인데 어때요.
ㅡ 그래도.
ㅡ 눈 좀 붙히세요, 마감때문에 이틀 동안 밤새셨으면서.
ㅡ 눈치는 빨라.
ㅡ 도착하면 깨워 드릴게요.


 어떻게든 버텨보려했던 세원은 용국의 눈치에 못 이기는 척 눈을 감았다. 그런 와중에도 얘도 졸릴텐데- 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지만, 생각은 생각 일 뿐. 얼마 못가 꿈나라로 가버린 세원은 창에 머리를 기댄 채 단잠에 빠져 있었다.


 신호 대기를 받음과 동시에 뒷좌석에서 담요를 꺼내 세원을 덮어주던 용국은 잠든 세원을 멍하니 쳐다보다 신호가 바뀌었단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운전중에 위험요소는 여럿이라지만, 지금 제겐 다른 무엇보다도 옆에 있는 세원이 제일 큰 위험요소였다.


 커브길을 돌면서도 혹시나 세원이 흔들릴까 조심히 운전을 하던 용국은 이런 제 행동에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저 잠에 들었을 뿐 인데 이렇게까지 조심스러 울 일인가 싶어서.



 집 앞에 도착해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리던 용국은 세원을 깨우려던 손을 거둔 채, 핸들에 기대었다. 오분만 있다 깨워야지 했던 생각은 십분을 넘어서고 있었고, 들었을 땐 쉬웠던 고백을 막상 실현하려니 무겁게만 느껴졌다. 십분에서 십오분, 십오분에서 이십분. 더 이상 차안에서 자게만은 놔둘 수 없어 조용히 세원을 부르던 용국은 미동도 않는 모습을 보며 볼을 살짝 건드렸다.


ㅡ 선배, 다 왔어요.
ㅡ ...어.
ㅡ 얼른 들어가서 주무세요.
ㅡ 어, 나야 고마운데 넌 또 가야되잖아.
ㅡ 그럼 가지말까요?
ㅡ 야. 그런 뜻이 아니라,
ㅡ 압니다, 미안해서 그러시는 거.
ㅡ 그래.
ㅡ 선배.
ㅡ ?
ㅡ 정 미안하시면 이따 저녁에 저랑 영화봐요.
ㅡ 영화?
ㅡ 네.
ㅡ 그래, 내가 저녁 살게.
ㅡ 네.
ㅡ 조심히 가고, 가서 푹 자.
ㅡ 일어나서 연락할게요.
ㅡ 응.



 차에서 내린 세원은 얼른 가라며 손짓을 해보였고, 그 모습을 보며 웃던 용국은 손을 흔들며 차를 출발시켰다. 분명 며칠 쪽잠을 잤고, 나름 운전도 한 탓에 피곤함이 잔뜩 몰려와야 정상인데 어째서인지 용국은 늦잠을 자고 일어 난 것 처럼, 몸이 개운함을 느꼈다. 어느덧 새벽도 짙어가고, 집에 도착 할 쯤이면 해가 뜰 시간이였지만 기분만은 좋고 또 좋았다.



 푹 자라던 세원의 말대로 집에 도착과 동시에 잠에 빠진 용국은 오후 네시가 넘어서야 일어났다. 시간을 확인하고 문자를 보내자 얼마못가 울리는 수신음에 다시금 핸드폰을 짚었다.



 선배. 제 부름에 일어났어? 라고 묻는 세원의 대답을 보며 용국은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만히 그 문자만 보다말고, 통화 버튼을 꾹 눌러 핸드폰을 볼 위에 올려 두었다.


ㅡ 응.
ㅡ 일어났습니다, 선배는 잘 잤어요?
ㅡ 잘 잤어, 덕분에.
ㅡ 이따 뭐 사주실 거에요.
ㅡ 어.. 뭐 먹고싶어?
ㅡ 아시잖아요, 저 가리는 거 없는 거.
ㅡ 맞다. 그럼, 스시 먹을래?
ㅡ 좋아요.
ㅡ 그래 그럼 일곱시까지,
ㅡ 그냥 일산에서 봐요, 제가 갈게요.
ㅡ 왜?
ㅡ 선배 나오는 거 기다리자니, 그냥 제가 가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서요.
ㅡ 안 귀찮아?
ㅡ 네.
ㅡ 그래 그럼, 이따 봐.



 끊긴 전화를 보며 번지던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용국은 그대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말끔히 샤워를 하고, 캐주얼하게 차려입고선 머리를 매만졌다. 요 며칠 쌀쌀하던 날씨와는 다르게 오늘은 정말 봄이 온 듯 했다. 현관 옆 테이블에서 지갑과 차키를 챙겨 집을 나서며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한시간하고도 이십분이 흘러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운동화 끈을 다시 묶던 얼굴 위로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자꾸만 웃음이 번져 흘렀다.



 일산에 도착하자 일곱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내려갈게- 라고 대답하던 세원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전화를 끊은 용국은 새삼 떨려오는 마음을 느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ㅡ 국이 안녕.
ㅡ 네, 선배.
ㅡ 밖에서 이렇게 보니까 또 새롭다.
ㅡ 뭐가요?
ㅡ 그냥, 새로워서.
ㅡ 어디로 갈까요.
ㅡ 잠깐만.



 네비게이션에 가게 이름을 입력하고선 벨트를 끌어 맨 세원은 가자고 얘길하며 용국과 시선을 맞췄다. 활기찬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출발시킨 용국의 차 안에선 달콤한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ㅡ 노래 좋다, 누구 노래야?
ㅡ 슈가볼이요, 가사도 좋아요.


 제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세원을 보며 용국은 다른 말 대신 운전에 집중했다. 차로 5분 거리인 목적지를 두고 두 사람은 같은 노래를 듣는걸로 대화를 대신했다. 가게에 도착해 지배인이 안내하는 자리에 앉은 테이블 위로 갖가지의 반찬들이 놓여졌다. 물 수건으로 손을 닦던 세원은 슬며시 용국을 살폈고, 물을 마시던 용국은 그런 세원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ㅡ 뭐 할 말 있어요?
ㅡ 아니 너, 주말이면 좋아한다는 누나랑 데이트 해야 하는 거 아니야?
ㅡ ... .
ㅡ 주말 아니고는 만날 시간 없잖아.
ㅡ 평일에도 봐요, 시도 때도 없이.
ㅡ 진짜?
ㅡ 네.



 하마터면 더 한 티를 낼 뻔 했던 용국이였다. 시도 때도 없이 본다던 제 말을 듣고도 눈치를 채지 못하는 세원을 보며, 정말 둔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더 놀리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 스며 들어왔다.


 주문한 음식들이 테이블을 채우고, 잘 먹겠습니다- 라고 얘길하는 세원의 앞에 물을 채운 잔을 놓아주던 용국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매일같이 회사에서 밥을 먹을때면 일 얘기가 전부였는데, 지금은 회사도 아닌지라 일 얘기는 더욱이나 민폐였다. 이유 모를 어색함이 감돌고 말 없이 밥만 먹는 세원을 보며, 새삼 궁금해하는 용국의 목소리가 번져갔다.


ㅡ 왜 아무 말도 안해요?
ㅡ 그렇다고 일 얘기를 할 수 없으니까.
ㅡ 그럼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ㅡ 뭔데?
ㅡ 선배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ㅡ 그러게, 그런 사람이 없네.
ㅡ 연애는요?
ㅡ 그러게, 나 좋다는 사람이 없네.
ㅡ 진짜요?
ㅡ 니가 그렇게 확인하니까 진짠 거 같애.


 아쉬워하는 얼굴을 보며 웃던 용국은 세원의 옆에 아무도 없단 걸 알게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먹다보니 어느새 가득 차 있던 그릇들은 하나씩 비워지고 있었다.


ㅡ 아, 영화!
ㅡ ?
ㅡ 예매 안했어.
ㅡ 지금가면 자리 없을까요?
ㅡ 잠깐만, 볼게.


 핸드폰을 들어 예매 상황을 살피던 세원은 근처 시간대엔 가득 찬 인원을 보며 울상 진 얼굴을 보였다.


ㅡ 미리 해놔야지 해놓고 까먹었어, 어.. 자리 남는 시간대가 열한시야.
ㅡ 늦네요.
ㅡ 그치?
ㅡ 근데 선배 좀 아쉬워하는 거 같습니다?


 물컵을 내려놓으며 제게 말하는 용국의 표정이 왠지 저를 놀리는 듯 했다.


ㅡ 안 아쉽거든? 너 좋아하는 누나랑 같이 봐.
ㅡ 그럴게요. 그럼 뭐할까요, 우리?
ㅡ 커피 마시러 갈까?
ㅡ 카페에도 사람 많을 거 같은데, 아님 커피 사들고 드라이브 갈까요?
ㅡ 드라이브?
ㅡ 드라이브.


 좋다며 고갤 끄덕이는 세원을 뒤따라나서던 용국은 아까 운전하며 봤던 카페를 생각하며 차에 올라탔다. 어디 카페 갈까 라고 물어오는 세원을 보며 저기요- 라고 대답하던 용국의 차는 드라이브 스루 코너로 향했다. 평소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 세원의 커피 취향도 알고 있던 터라 주문은 어렵지 않았다. 커피를 받아 든 차는 한강변을 따라 달렸고, 오랜만에 온다며 좋아하는 세원의 얼굴을 보며 용국은 속도를 조금 줄였다.


ㅡ 선배.
ㅡ 응.
ㅡ 저랑 영화봅시다.
ㅡ 영화, 너 좋아하는 누나랑 본다며?
ㅡ 네, 그러니까 저랑 영화봅시다.
ㅡ ... .
ㅡ 이번주도 보고, 다음주도 보고.
ㅡ ... .
ㅡ 날도 좋은데 우리 내려서 좀 걸을까요?
ㅡ 야.
ㅡ 네.
ㅡ 뭐야 너?
ㅡ 뭐가요.
ㅡ 아니 지금 이게.
ㅡ 안지 2년 됐고, 매일 좋아한다고 티를 내도 매일 모르고, 저한테 어른인 척 하는 거 보면 마냥 귀여운 그 사람이 선배예요.
ㅡ ... .
ㅡ 선배는 저 어때요?
ㅡ ... .
ㅡ 나는 선배 좋은데.


 잔잔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덤덤히 얘기하던 용국의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밤을 알리던 달빛은 구름에 묻어 연한 빛을 내뿜었고, 그 빛은 번져가며 세원을 비췄다. 갑작스러운 용국의 고백에 어수선해진듯 굳은 얼굴을 환한 빛이 꼬집어 내었고, 고개를 돌려 그런 세원을 살핀 용국은 재촉 대신 벨트를 풀며, 앉아 있던 의자 시트를 뒤로 땡겼다.


ㅡ 생각 할 시간이 필요한 거 같은데, 정리되면 깨워 주세요.
ㅡ ... .
ㅡ 대답하기 부끄러우시면 아까 그 영화 보러 가자고 하셔도 되고, 아니면 집에 가자고 하셔도 되고.
ㅡ ... .
ㅡ 전 눈 좀 붙히겠습니다.


 너무도 덤덤하고 거짓없는 목소리가 잦아들고, 홀로 고민을 하던 세원은 여기저기 시선을 옮겨두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확인하자 너무도 태연한 얼굴로 잠에 든 용국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실소도 나오곤 했다.


 그렇게 십분, 이십분, 점점 흘러가던 시간은 어느새 열시를 넘어서고 있었고 이제는 대답을 해야만 할 거 같았다. 설령 그 대답이 거절일지라도.


ㅡ 국.
ㅡ ...네.
ㅡ 영화 보러가자.


 세원의 말에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푼 용국은 웃음 진 얼굴을 보이며 시동 버튼을 눌렀다. 양쪽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며 주차 된 차를 빼던 용국의 얼굴로 잔뜩 묻은 웃음을 보자니 부끄러움이 밀려 온 세원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얘길했다.


ㅡ 그만 웃어.
ㅡ 자기가 웃게 해놓곤 뭘, 예매는 했어요?
ㅡ 아니, 해야지.
ㅡ 좋은 자리로다 해요.
ㅡ 좋은 자리가 어딘데?
ㅡ 제일 뒤 외진 곳?
ㅡ 외진, 야.
ㅡ 그 자리가 영화보기 얼마나 좋은데요, 어둡고 스피커도 가까워서.
ㅡ ... .
ㅡ 그래서 키스하기도 참 좋죠.
ㅡ 야.
ㅡ 안해요 안해, 나도 첫키스로는 거기 안 땡겨요.


 세원의 대답을 듣고서 조금 더 대담해진 용국은 오히려 제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는 세원의 반응에 재미가 들린 듯 했다. 평소처럼 그만하라며 얘길하던 세원이였지만, 어째서인지 늘 같던 말투엔 부드러움이 조금 묻어 있었다.


 가는 곳 마다 꼭 달빛이 차를 쫓아오는 듯 했다. 마치 사랑에 번진 두 사람을 밝게 비추려는 듯, 그런 그들을 밝히려는 듯이.

매거진의 이전글 B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