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실패한 게 아니다
브레이킹 배드는 악인의 몰락일까, 아니면 주인의 외로움일까.
많은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착한 선생이 악당으로 변해가는 이야기’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한 남자가, 자신만의 도덕을 창조한 순간부터 끝까지 자신을 밀어붙인 기록이다. 그리고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노예의 도덕’으로 살아가는 세계였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약한 자들이 만든 도덕은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직접 싸울 수 없는 자들이 강한 자를 ‘악’이라 부르고, 자신의 무력함을 ‘선’이라 포장하면서 세상은 그렇게 ‘착해졌다’.
하지만 월터 화이트는 그런 도덕의 틀을 거부하고, 스스로 탈출한다.
가족, 경찰, 법, 친구 — 그 누구의 기준에도 기대지 않는다.
그는 ‘착해야 한다’는 세상의 주문을 뚫고, 자기만의 기준을 창조해 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You clearly don't know who you're talking to, so let me clue you in. I am not in danger, Skyler. I am the danger."
이 대사는 도덕을 뛰어넘은, 존재 자체가 위협이 되는 자, ‘위험한 인간’이자 주인으로서의 선언이다.
월터는 처음엔 죽음을 기다리던 남자였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벌겠다고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솔직해진다. 그는 생존의 윤리에서 벗어나, 존재의 방식을 바꾸었고,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삶을 선택한다.
그는 마약을 제조하고, 조직을 설계하고, 제국을 세운다. 그것은 단지 범죄가 아니었다. 그것은 과학자로서의 창조였고, 삶을 통제하려는 ‘초인의 의지’였다.
가족도, 친구도, 시청자도 끝내 그를 ‘악당’이라 규정했다.
아내 스카일러는 정의, 윤리, 도덕을 말했지만, 실제로는 월터의 힘이 두려웠던 것뿐이었다. 그녀는 중간에 협조하면서도 끝내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자신이 만든 도덕의 틀 속에 그를 가두었다. 그녀는 강한 힘을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나약함을 ‘선’이라 믿는 노예 도덕의 전형이었다.
제시는 조금 다르다. 그는 월터에게 충성했고, 동료의식을 가졌지만 끝내 그의 도덕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지 못한 그는 항상 타인이 정해준 울타리 안에서 살아갔고, ‘착한 피해자’라는 정체성 안에 머물게 된다.
스카일러는 확신에 찬 노예, 제시는 방황하는 노예였다. 둘 다 결국, 월터가 만든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떠난다. 그들은 모두, 자기 삶을 살지 않은 자들이었다. 스스로 기준을 만들지 못한 자들이었다.
『브레이킹 배드』는 중반까지 ‘자기 세계를 창조하는 주인의 이야기’처럼 흘러간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월터의 행동은 아동 독살, 마이크 살해, 제시 조종 등 점점 ‘악’으로 포장된다.
이건 강한 자를 어떻게든 끌어내리고 싶은 대중의 심리를 작가가 반영한 결과였다.
결국 작가는 드라마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봐라, 결국 악은 망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야말로 월터의 내면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을 끝까지 드러내기엔 세상의 도덕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월터를 죽이는 방식으로 ‘안전하게’ 이야기를 마감했다.
그게 대중이 원하는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월터 화이트는 결코 실패한 게 아니다. 그는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살아낸 사람이었다.
그는 울지 않았고, 변명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말했다.
“I did it for me. I liked it. I was good at it.”
이것은 완전한 자기 긍정이며, 주인의 말투다.
그는 이해받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는 것을 택한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