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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현승 Sep 25. 2021

어머니와 잔소리 소낙비

가족의 시간 15

어머니의 잔소리 소낙비가 내린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할머니댁에 갔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께 가족 대화를 해 보자고 말씀드리자 어머니도 좋다고 하셔서 처음으로 아이들이 할머니와 함께 하는 가족 대화가 열렸습니다. 어머니께서 참석하셔서 기대가 되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소 손주들을 만나면 잔소리를 하셨습니다. 이날도 그랬습니다. 가족 대화 때 어머니께서 하루 일상을 말씀하시면 되는데 오랜만에 보는 손주들 걱정부터 하셨습니다. 가족 대화 자리에서는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약속인데 제가 어머니께 미처 그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당연히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면 되는 줄 아셨습니다. 말문을 여시자마자 손녀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시면서 책과 옷을 늘어놓는 습관은 좋지 않다고 자기 방을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이 말씀을 시작으로 할머니의 잔소리는 건강, 시간 관리, 정리 정돈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이어졌습니다. 초2, 초6 손주들은 예상치 못한 할머니의 잔소리에 당황했습니다. 연필을 그렇게 잡으면 어떡하냐. 의자에 앉을 때는 허리를 펴야 한다. 젓가락을 왜 이리 이상하게 잡냐. 누워서 책 보면 눈 나빠진다. 매일 영어 단어를 외워야 실력이 는다. 할머니의 잔소리 소낙비를 맞으며 아이들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답니다.


저희끼리였으면 중간에 살짝 신호를 보냈을 텐데 어머니께서 말씀하셔서 흐름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로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지만 아이들에겐 평소에 맛보는 가족 대화가 아니었습니다. 가족 대화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가족 대화 약속을 모르셨고, 미리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것을 말씀을 못 드린 아빠의 책임이 컸다고 아이들을 다독였습니다. "어머니, 이 시간만큼은 서로에게 어떤 조언이나 잔소리를 하지 않기로 했어요."라는 말씀을 못 드려 후회를 했네요.


어머니의 걱정 염려 목록은 다양합니다. 물도 빨리 마시면 체한다. 식탁 의자를 빨리 빼다가 발등을 찍혔다고 하시며 서두르지 말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무거운 걸 들 땐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들어야 한다. 소파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책 읽지 마라. 아이들이 연필 제대로 잡고 젓가락질 잘하도록 신경 좀 쓰자. 비타민은 잘 먹고 다니냐. 너는 안압이 높으니 안과에서 녹내장 검사를 매년 받아야 한다. 늘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으십니다. 칠순을 앞두신 어머니께서 살아오신 말 문화에는 안전을 신경 쓰시는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브런치 작가가 되어 글을 쓴다는 소식에 긍정적인 면보다는 걱정 안테나부터 세우십니다. 학교 일이 바쁠 텐데 아들이 몸도 피곤하고 시력도 나빠질까 염려하십니다.


문제는 저야 늘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었기에 내성이 생겼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잔소리 소낙비를 맞고 할머니와 옥신각신 했고 예민해져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의 속상한 감정을 읽기도 하고, 잔소리로 손주 사랑을 표현하시는 할머니의 마음도 알기에 난처했네요. 그런데 사실 저도 어머니의 잔소리 소낙비를 맞으며 짜증도 많이 냈고 대화를 피해야 할 이유를 찾았습니다.


"가족 대화할 땐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해 주시면 되세요. 이 시간만큼은 저희 부부와 손주들 걱정은 잠시 쉬시기로 해요."


가족 대화 시간에는 잔소리와 조언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께 말씀을 드리지 않아 잔소리 소낙비가 좌르르 내렸으나 이후론 어머니께 부탁드렸습니다. 본인 얘기로 시작하다가도 중간에 걱정 가지를 뻗으셔서 손주들 얘기 말고 어머니 하루 일상을 듣고 싶다고 재차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대화 상황이 낯설으셨는지 두 번 정도 함께 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어머니께서 일상과 감정을 말씀하신 때가 언제였는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모들과 경주에 다녀오신 후에도 어땠는지 말씀하시기보다 가족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더 궁금해 하셨습니다.


칠십 가까이 비바람 맞으며 인생길을 걸으신 어머니. 그 사이 가슴앓이와 말 못 할 사연은 어머니 삶에 켜켜이 쌓였을 것이지요. 어머니의 말 문화는 그렇게 생겨났을 것입니다. 대화가 단지 말을 주고받는 언어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말하는 가족의 특징과 습관까지 오가는 모든 과정이 대화였습니다. 그 모든 상황을 더듬어 헤아리는 마음도 필요했습니다. 가족 대화는 어머니의 말 문화를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면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아이들은 할머니를 만나면 잔소리 가랑비에 젖기도 하고 소낙비가 내릴지 몰라 할머니 댁 문 앞에서 마음의 우비를 챙겨 입기도 합니다.


바람이 불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듯 어머니의 잔소리 걱정 비도 어느 때 즈음 줄기가 약해지면서 그칠 때가 찾아옵니다. 늘 듣던 어머니의 목소리, 더 이상 맞을 수 없는 잔소리 소낙비가 못내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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