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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현승 Aug 31. 2021

아빠, 얘기할 게 하나도 없어.

가족의 시간 07

"아빠, 얘기할 게 하나도 없어."

가족 대화 첫 번째 만남에서 첫째 아이의 차례가 되었을 때 아이가 말한 첫마디였습니다. 그래서 일단 패스! 다음 네 살 어린 둘째는 누나 따라쟁이여서 똑같이 얘기하더라고요. 이 말이 나오리라 제가 예상했을까요? 당연히 짐작했습니다. 올 것이 왔다고 준비했기에 그리 놀라진 않았어요. 


"(당황치 않고) 그럴 수 있지!"


가족 대화를 실패할 때는 아이가 툭 던진 한 마디와 별 뜻 없는 행동에 흔들렸어요. 아빠는 노력하는데 아이들은 왜 내 마음을 몰라줄까 하며 섭섭이가 자주 찾아왔어요. 당시 11살, 7살 된 아이들에게 말이에요. 아이는 아이잖아요. '아이'였기에 표현할 수 있는 목록들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오늘만 대화하고 끝낼 우리 사이가 아니기에 이젠 "그럴 수 있지!" 하며 쿨하게 넘어갑니다. 


그런데 제게는 여전히 쿨하게 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만의 옳다는 기준과 정답을 내려놓는 것이었어요.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한 감정의 요동침을 잔잔하게 가라앉히는 일도요. 그런데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사는 건 다른 차원이잖아요. 일상에선 저의 정답과 기준을 엄하게 내세우며 아이를 다그치기도 했습니다. 


가족 대화를 하기 전에 무엇을 이야기할지 각자 간단히 메모하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대화를 마친 후 메모한 것이 아까워서 사진으로 남기곤 합니다. 한번은 평소처럼 칠판에 메모한 것을 사진 찍으려고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데, 둘째가 갑자기 뛰어와 지웠습니다. 분명히 아빠가 칠판 앞에서 스마트폰을 대며 사진 찍으려 했는데 말이에요. 순간 당황했습니다. 아빠가 사진 찍으려 했는데 왜 갑자기 지웠냐고 물으니 아빠가 사진 찍는 줄은 몰랐고 그냥 지우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뭐라고... 속상하고 화까지 났습니다. 식탁 앞에서 아이를 세운 채 3분이나 얘기했어요. 가족 대화를 잘 마쳤는데 감정적으로 날이 선 채로 다그쳤습니다. 사실 저는 둘째가 왜 그렇게 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의미가 없었어요. 아빠랑 장난하고 싶었던 것이었어요. 저도 그렇게 주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무슨 행동인지 의미를 꼬치꼬치 캐물었네요. 3분 정도 지나고 나니 속상하고 화낸 모습이 부끄러워졌습니다. "현승아, 화낼 걸 좀 화내고, 한마디로 끝낼 것을 왜 3분이나 일장 연설을 했니?"


(다시 한 번) 그럴 수 있지!


매사에 진지하여 늘 다큐처럼 인생을 사는 제게 아이들은 또 다른 세상과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고 있습니다.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고 가볍게 넘기기도 하고, 장난을 장난으로 주고받는 몸짓도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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