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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현승 Sep 02. 2021

대화 그릇을 빚는 마음

가족의 시간 08

'가족 대화' 옆에 '그릇'이라는 말을 더해 보았습니다. 주방에는 음식 담는 그릇이 있잖아요. 저희 가정에는 가족들의 일상을 담는 대화 그릇을 빚고 싶었습니다. 밥, 국, 반찬 그릇이 있듯, 가족의 소소한 일상과 감정을 대화 그릇에 담으면 어떨까 했어요. 아홉 살 둘째는 피구 할 때 옆반 친구가 자기 쪽으로 넘어와 공을 가져가서 기분이 나빴다는 마음을 대화 그릇에 담기도 했고, 열세 살 첫째는 아는 언니네서 저녁 먹고 놀기로 해서 집까지 갔는데 갑자기 언니네 외할머니께서 오셔서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속상한 마음을 대화 그릇에 담았습니다.


매일 대하는 밥과 반찬이 특별하지 않잖아요. 가족 대화 재료도 평범합니다. 처음 가족 대화를 할 땐 특별한 무엇을 찾았습니다. 아내도 매일 비슷한 얘기만 반복하는데 이런 대화가 무슨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뭐라고 해야겠다 싶어 대화 관련 책을 사서 실천 사례를 따라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퇴근 후 피곤한 몸으로 뭔가를 준비한다는 게 녹록지 않았습니다. 수업 활동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아무리 좋아도 부모가 지친다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지치지 않고 서로의 일상을 함께 나누고 싶었기에 별것 아니라도 좋았습니다. 


하루하루 가족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매일 반복되는 뻔한 일상에 보물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아내와 아이의 목소리로 듣지 않았다면 알 길 없는 가족의 상황과 그로부터 비롯된 마음이 보물이었습니다. 가족 대화 초기 새로운 것 없는 대화에 싫증을 느낀 아내는 이제는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좋다고 합니다. 평범한 가족의 일상이 평범하지 않게 다가오는 그 느낌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당연하다고 여긴 가족들의 하루하루가 당연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귀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아직 그렇진 않습니다. 저와 아내만 그렇게 느낍니다.


오늘도, 하루를 마치기 전에 서로의 희로애락을 대화 그릇에 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제게 가족 대화 그릇이란 서로의 삶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구별된 가족의 시간입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에 관심을 갖고 귀 기울이는 마음이 가족 대화 그릇을 빚는 마음이 아닐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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