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현승 Sep 04. 2021

작은 틈새에 가족 대화 꽃을 심다

가족의 시간 09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시간제한을 두지 않는 건 어때?
"무슨 말이야? 시간제한이 없으면 이야기가 계속 늘어지잖아.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대화할 때만큼은 핸드폰을 꺼 둘까?"
"급하게 연락할 올 수 있는데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맨날 얘만 먼저 시작하는 것 같아. 순서를 정했으면 좋겠어."
"순서를 정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잖아. 그냥 하고 싶은 사람부터 하자."
"서로 먼저 하겠다며 시간을 끄는 것보다 깔끔하게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자."


좀 유치해 보여도 누군가 일방적으로 정하지 않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재밌습니다. 그릇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죠? 도공이 정성을 다해 작품을 빚듯, 의도적으로 시간을 내어 대화 그릇을 만들고 있어요. 가족 대화 그릇을 빚기 위해 애쓰는 노력들이 있습니다. 약속된 시간에 거실로 나오는 노력, 식탁에 앉아 가족의 눈빛을 바라보는 애씀, 하고 있는 걸 잠시 멈추고 자기 시간을 내어주는 모습입니다.


저희 집에는 가족 대화 그릇 외에 '자유 시간 그릇'도 있답니다. 어느 집이나 있는 흔한 그릇입니다. 가족 대화 그릇과 달리 자유 시간 그릇은 특별한 연습 없이 쉽게 만들어집니다. 이 그릇에는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걸 담습니다. 저희 집에선 대부분의 일상을 자유 시간 그릇에 담습니다. 13살 첫째는 자기 방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듭니다. 다행히 가족 대화 시간에 자유 시간 그릇에 무엇을 담았는지 일부를 소개합니다. 9살 둘째는 아직은 아빠와 노는 걸 좋아해서 뭘 하든 "아빠, 이거 봐 봐." 하며 쉴 새 없이 부르지만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할 때는 왜 이렇게 그릇 크기가 작냐며 좀 더 큰 자유 시간 그릇을 달라고 외칩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지만 자유 시간 그릇은 턱없이 작아 아쉬워합니다. 저도 학교에서 업무를 끝내지 않고 가정에까지 들고 오는 습관이 있어 이 그릇을 어떻게 하면 좀 더 크게 할 수 없을까 고민합니다. 저희 집에선 자유 시간 그릇이 가족 대화 그릇보다 비교가 안 될 만큼 크고 단단합니다.


자유 시간 그릇의 특징은 크기가 클 뿐더러 가족 모두가 좋아합니다. 몰입도도 높습니다. 이 그릇에 자기 일상을 담을 때 불평하지 않습니다. 한두 시간이 뭐예요? 세네 시간도 금방 지납니다. 둘째가 저를 계속 찾는 것만 빼면요.  자유 시간 그릇을 만들자고 하면 거부감이나 갈등 없이 해맑은 미소를 띱니다. 반면 가족 대화를 하자고 하면 "또 해요? 언제까지 해요? 맨날 똑같은데..."로 시작하는 100가지 불평 목록이 튀어나왔습니다. 가족 대화 그릇에 하루 이야기를 담는 시간은 처음엔 고작 15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15분이 마치 150분처럼 느껴져요."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었습니다. 자유 시간 그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고 초라했습니다.


집이란 가장 편한 공간이잖아요. 이곳에서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누리는 건 당연합니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편히 누리는 일상이 문제가 아니죠. 진짜 문제는 가족들이 서로 연결되고 공유되는 경험이 없는 일상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클수록 개인 자유 시간 그릇이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하든 뭔가 함께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려 할 때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지 않냐고들 하십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철학이 다르고, 각 가정의 배경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희 가정의 시간이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채 흘러가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자유 시간 그릇만이 가족의 시간을 가득 채우는 현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삼사 년만 더 지나면 가족의 시간, 가족 대화 그릇을 만들자 해도 그런 걸 왜 만드냐고, 숙제할 시간도 부족하고 삶 자체가 바쁘다고 할 때가 올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저만치 흘렀을 때 가족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젠 개인의 시간으로 채워진 가족의 일상에 작은 틈을 내고 있습니다. 가족의 시간, 그 작은 틈새를 찾아 가족 대화 꽃을 심어 놓은 느낌도 드네요. 뿌리도 약해 보이고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지난 2년 동안 민들레처럼 생명력 있게 살아냈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가족만이 들을 수 있고, 가족의 목소리로 듣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오늘의 사건과 감정, 그 하루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습니다.

이전 08화 대화 그릇을 빚는 마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