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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현승 Sep 08. 2021

아빠의 두려움_누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까?

가족의 시간 11

혹시 가족들과 대화를 할 때 긴장하는 분이 있으신지 모르겠네요. 여기서 대화는 "밥 먹었어? 숙제 다 했니?" 등 집에서 오가는 일상 대화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 모였을 때 한 사람이 여러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과 경험을 펼치는 대화입니다. 저는 이런 대화 상황을 맞이하면 두렵습니다. 가족들이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지 걱정이 되고, 왠지 지루해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학창 시절에 때마다 유행했던 웃긴 얘기가 있었습니다. 최불암 시리즈 같은 것이요. 당시 아재 개그였죠. 저와 같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친구들이 하면 잘만 웃는데 제가 하면 분위기가 싸해졌습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만하자는 눈빛을 보내왔습니다. 성공 경험이 없다 보니 누군가에게 설득하거나 설명하는 상황이 되면 자리를 피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비슷한 실패를 반복했고, 두려움은 짙게 쌓였습니다. 국어 교사가 돼서도 그랬습니다. 문법 같은 내용은 괜찮았으나 문학 작품 줄거리를 알려 주는 상황에서는 자신감이 떨어졌습니다.


가족 대화 계획을 세울 때도 그랬습니다. 가족들에게 저의 하루 이야기를 할 때면 웅크려 있던 두려움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지우고 싶던 과거 장면을 꺼내 옵니다. 용기를 짜내어 말했을 때 가족들이 듣지 않고 서로 딴 얘기를 하기도 했고, 시작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언제 끝나는지 묻기도 했습니다. 한창 이야기를 하는데 끼어들어 화제를 바꾸기도 했네요. 속상했던 장면 등이 떠올랐고, 상처 받는 게 두려워 아예 안 하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저는 분명 상처 받기 쉬운 아빠였고, 남편이었습니다. 제가 봐도 감수성이 좀 예민한 편이에요. 영화를 같이 봐도 제가 먼저 눈물을 흘렸고, 아이들은 신기한 듯 저를 바라봤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특징은 여전히 제 안에 머무르고 두려움도 여전하지만 가족들과 한 자리에 모일 때 요즘은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저도 가족들도 대화 초보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내도 저도 성장 과정에서 가족을 존중하는 대화를 연습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희 아이들도 비슷했습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가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함께 모이지도 않았고, 함께 모여 서로를 바라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닭살 돋고 어색하고 낯설기에 더 그랬습니다.


대화 초보자인 저희 가족들은 그래서 1주일에 세네 차례 거실 식탁에 모이는 연습을 합니다. 약 2년을 연습하고 있지만 설익은 모습이 많습니다. 하루 이야기를 들어주자고 모인 자리에서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고, 판단하는 말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지만 몸에 밴 말 습관이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 시간을 기다립니다. 가족들이 온전히 저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저를 바라보는 아내, 첫째, 둘째의 눈빛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아빠의 재미가 없는 일상이지만 끝까지 들어줍니다. (9살 둘째는 아직 갈 길이 멀긴 해요) 저도 아내와 아이들이 이야기를 할 때 판단하지 않고 끝까지 들으려 노력합니다. 삶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바로 그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위로가 됩니다. 밖에서 치이고 넘어져 마음에 상처가 나도 이 시간이 되면 가족들이 소독도 해 주고 반창고도 붙여줍니다. 대화 울렁증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니다. 이제는 밑바닥이 보일 만큼 조금 고여 있습니다.


p.s.

어릴 적 집에서 어른들이 싸 때 (술이 들어가면 싸우는 날이었죠) 책상 밑에 들어가 아픈 마음으로 꾹꾹 눌러쓴 일기가 기억납니다. 끝까지 들어주면 좋겠는데... 그렇구나 해 주면 좋겠는데... 괜찮다고 해 주면 좋겠는데... 왜 어른들은 이 말을 안 할까? 꼭 싸우게 만드는 말들만 골라서 하셨습니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면 모두가 패배자였는데 말이에요.

어느덧 제가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그냥 끝까지 들어주고, 그렇구나 해 주고, 괜찮다고 해 주는 어른이 될 테야!" 책상 아래에서 웅크린 채 또박또박 썼던 문장이지만 이게 어렵다는 걸 알아가네요. 그래서 오늘도 연습이 필요한 것 같아요. 초보 어른들도 초보 아이들도 다 같이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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