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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현승 Sep 12. 2021

지금은 듣는 시간입니다

가족의 시간 12

가족의 일상을 듣는 편한 분위기지만 서로를 존중할 약속은 필요했습니다. 한두 번으로 끝내지 않고, 함께 오래 가고 멀리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대화할 때 자기만의 버릇이 있더라고요. 첫째 아이는 볼펜 꽁지를 또깍또깍 눌러댑니다. 둘째는 발을 계속 구르기도 하고 의자 뒤쪽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합니다. 저는 의자에 발을 올려 발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아내는 급하게 남겨야 할 카톡이 있다며 핸드폰을 봅니다. 몇 차례 그럴 수 있지 하며 넘어가지만 조금씩 쌓이면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향합니다. ‘가족끼리 이 정도쯤이야.’ 할 수 있지만 가족이기에 서로를 존중하는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했습니다.


저희의 가족 대화는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기보다 하루 있었던 일을 듣는 시간입니다. 하루 일상을 말하는 시간이라 하지 않고 '듣는 시간'이라 부른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족들이 잘 말하지 못하는 상황은 거의 없었지만, 잘 듣지 않는 장면은 많았습니다. 말하기는 쉬운데 듣기가 어려웠습니다. 듣는 힘은 저보다 아이들이 좋더라고요. 아이가 친구와의 갈등이나 고민을 꺼낼 때 문제 해결책을 얼른 말해 주고 싶습니다. 아이가 선택한 방법보다 더 나은 무엇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거든요. 한번은 초2 둘째가 점심 먹으며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점심 때 까르보나라가 나왔어. 근데 하건이가 까르보나라 받으며 난 이거 정말 싫은데 했어. 내가 친구들하고 심심해서 까르보나라, 까르보나라, 까르보나라 하는데, 갑자기 하건이가 우는 거야. 당황했어. 걔를 놀린 것도 아닌데..."


이쯤 되면 참기가 무척 힘듭니다. 가족 대화 초기에는 불쑥 끼어들어 시원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해결책까지 말해주었습니다. 요즘은 마음 속으로 '듣는 시간! 듣는 시간!' 외치며 버티려 합니다. 물론 아빠로서 조언은 할 수 있겠죠. 위 상황에서 제가 끼어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가 말하는 시간이 멈추어졌습니다. 저는 이야기하고 아이는 듣는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런 장면이 반복이 되면 가족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아닌 부모의 조언이나 잔소리를 듣는 시간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의 말과 행동에 뭔가 부족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더라도 성급하게 조언하거나 중간에 말을 끊지 않는 약속이 필요했습니다. 자녀가 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누군가 이야기를 할 땐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듣기만 하는 걸 연습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른 사람은 끝까지 들으려고 합니다. 약속을 지키는 일에는 부모든 자녀든 예외가 없습니다. 그 누구든 하고자 하는 말이 중간에 끊기면 기분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실제 가족 대화에서 듣기만 하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며 슬쩍 끼어드는 일들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이럴 땐 "좀 이따가 다 끝나고..." 하며 살짝 알려줍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끝까지 들어주는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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