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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진 Sep 15. 2023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취하라.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 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하라. 그리고 때때로 궁궐의 계단 위에서, 도랑가의 초록색 풀 위에서, 혹은 당신 방의 음울한 고독 가운데서 당신이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 버리거든 물어보아라. 바람이든 물결이든 별이든 새든 시계든 지나가는 모든 것, 슬퍼하는 모든 것, 달려가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게 지금 몇 시인가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다.  
- <미생> 제13 -

취하라.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취하기에 가장 쉬운 것은 술이다. 첫 잔의 쓴 맛만 잘 참으면 술은 술술 저절로 넘어가고 취하게 된다.

이 때문에 술집에 손님이 그렇게 많은 걸까? 하지만 난 술을 전혀 마시지 않기 때문에 술에 취하긴 어렵다.


그래서 나는 항상 취할 대상을 찾는다.



술 다음으로 취하기 쉬운 것은 약이다. 전처럼 수면제를 마구 털어 넣지는 않지만 정신과나 신경과 약에 근육 이완제와 신경안정제가 들어있기 때문에 약을 먹으면 나른해진다. 운전을 해야 되는 날이면 아침 약을 거른다.

특히 저녁약은 더 독하기 때문에 아들의 숙제도 못 챙기고 잠이 들 때가 많다. 약에 취해 자면 팔다리에 힘이 쫙 빠진 채 깊게 잔다. 땅 속 깊은 곳으로 파 들어가듯 잠에 빠져든다. 

다만, 잠에 취하면 바람과 물결, 별과 시계가 내가 대답하는 것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아쉽다.



혼자 있기 & 글쓰기

갓 돌이 지난 아기를 돌보기 위해 육아휴직 중인 동생이 있다. 양가 어른들 도움 없이 혼자 아기를 키우는 대단하고 야무진 동생에게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어봤다. 잠시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어렵다는 거였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때조차 문을 열고 아이와 눈을 마주쳐야 되니, 아기를 키운 엄마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그 동생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하루에 최소 9시간을 혼자 보낸다. 초등학생 아들이 등교 후 학원 두 세 곳을 돌고 집에 오면 오후 6시가 되기 때문이다. 1학년때부터 이렇게 여유시간이 생긴 건 아니었다. 1학년 때는 아이와 걸으며 등하교를 함께 했고, 학원에 직접 데려다주거나 아파트 마당에서 학원 봉고차를 함께 기다렸다. 그 후 혼자 학교를 가게 됐고, 잠시 간식만 챙겨주면 되는 걸로 바뀌더니 이젠 아예 집에 오지 않고 학원을 다 마치고 집에 돌아온다. 


요리는 처음부터 포기했기 때문에 청소와 빨래 등 집안일을 해도 두 시간이면 아주 넉넉하다. 나머지 시간은 의도적으로 휴식하라는 교수님의 처방에 따라 약을 먹고 자거나 쉰다. 지금처럼 브런치에 글을 적기도 하고 독서도 한다. 최근에 독서 취향이 바뀌어 뻔한 말이 잔뜩 적혀있는 자기 계발서는 거의 보지 않는데. 대신에 소설책을 본다. 8월부터 지금까지 소설책을 10권 정도 구매했다. 작가님들의 문체, 양식, 소재, 묘사 방법 등을 공부할 수 있게 꼼꼼히 읽는다. 

하루에 30분, 미래를 위해 투자하면 내일을 바꿀 수 있다던데 나는 5~7시간을 투자하는 셈이니 과연 미래가 바뀔지 내심 기대된다. 



새벽 걷기

오늘처럼 궂은 날씨, 내리는 비를 핑계 삼아 매일 걷는 것은 아니지만 새벽에 걷는 것이 참 좋다. 새벽 4시 45분 알람에 눈을 떠 간단히 준비하면 5시에는 아파트 출입문을 나설 수 있다. 산책길이 꽤 잘 조성돼 있고 드문드문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무섭지는 않다.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이 다정하게 손 잡고 천천히 걷는 분들도 계시고 세네 명 남짓 한 할머니들이 무리를 지어 걷기도 하신다. 대부분 편마비가 있으신지 한쪽을 절뚝절뚝 걸으신다. 지팡이를 짚고 걷기도 하신다. 

특정 지점을 지나면 아래위로 멋진 레깅스를 입고 헤드셋을 낀 채 달리는 아가씨가 보인다. 나처럼 런데이를 들으며 운동을 하는 것일까? 무슨 사연으로 아가씨 혼자 새벽에 운동을 하는 건지 궁금하다.

나처럼 우울증을 떨치려고 뛰는 것일까? 아니면 할머니들처럼 편마비를 극복하기 위해 뛰는 것일까?  



위 세 가지가 요즘 나를 취하게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아직 바람과 별, 새와 슬퍼하는 모든 것들에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답을 들을 때까지, 어깨를 무너지게 할 만큼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때까지 

쉴 새 없이 달리고 더 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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