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둥이가 먼저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굳이, 이 추운 겨울에
하교하는 둥이를 마중하러 학교로 갔습니다.
또 쉬게 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2월 초에 복직할 예정이니
'그땐 하고 싶어도, 하원하는 아이를 마중 나올 수 없을 테니 할 수 있을 때 해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학교 후문과 인접한 아파트에 차를 주차하니 하교하는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교문 입구에서 엄마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는 아이들,
친구와 잘 놀았는지, 선생님 말씀은 잘 들었는지, 급식은 맛있게 먹었는지 등을 물으며 책가방을 받아 드는 엄마들. 화사한 조명과 따뜻한 음악이 흐르는, 행복과 사랑이 가득 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 멀리, 아이들 속에 우리 둥이가 보입니다.
친구들과 장난치는 모습을 보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4학년이지만 엄마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제 품에 안기는 둥이를 꼭 안아준 후 차로 돌아가던 중 둥이가 말합니다.
"엄마, ADHD라고 알아? 학교에서 배웠는데 편식하면 ADHD라는 병이 걸린데. 난 밥을 잘 먹으니까 그런 병에 안 걸리겠지?"
둥이는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ADHD라는 것도 지능이 많이 낮다는 것도.
제가 항상 둥이한테 해 준 얘기처럼, 사람마다 공부하는 속도가 다 다르며 자신은 조금 천천히 따라갈 뿐이라고 알고 있죠. 매일 먹는 약도 '뇌 영양제'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둥이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죠.
둥이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튼튼해진 후에 알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그때, 둥이가 받을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싶은 마음에 저는 둥이에게 말했습니다.
"둥아, ADHD는 암처럼 엄청 위험하거나 심각한 병은 아니야. 단지, 남들보다 집중을 조금 못할 뿐인데 약을 먹으면 별 문제없데."라고 말이죠.
같은 아파트에 지적장애로 통합반에서 수업을 듣는 아이가 있습니다. 둥이보다 한 살 많지요.
어제 그 아이 엄마와 차를 마셨는데, 중학교부터는 특수학교로 가기로 결정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저것 생각을 안 한건 아니지만 아이의 행복만 생각하고 싶다며, 일반 중학교에 보내는 게 아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이죠. 그 엄마의 마음이 너무나도 공감됐습니다.
그리고 둥이에게도 그런 교육이 필요한 게 아닐지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특수학교, 특수교육......
2023년(벌써 작년?), 심리상담 중 제 유년기의 상처를 찾고 치유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제 상처 중 하나는 '엄마가 장애인으로 살 권리(?)를 뺏어간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이 좀 이상하죠?
저는 선천적 지체 장애였기 때문에 엄마가 제게 숨기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제가 저의 장애를 알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 제가 장애를 갖고 태어난 이유도 궁금했지만, 분명히 장애인인 저를 일반학교에 보낸 이유도 궁금했습니다.
엄마는 특수학교를 추천하는 교장선생님께, 제발 학교만 다니게 해달라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전학 가겠다는 약속을 하고 저를 어렵게 일반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저는 고학년 때 엄마에게 울면서 빌었습니다. '제발 장애인 학교로 보내달라고, 거기서도 공부할 수 있는데 왜 나를 여기에 외롭게 두냐고' 말이죠. 엄마는 끝까지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렇게 전 일반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심리상담 후 저는 엄마에게 원망하듯 물었습니다.
"엄마, 엄마는 그때 왜 날 특수학교로 보내지 않았어?"
"어차피 일반인들 속에서 살아가야 되니까. 의사 선생님이 네 치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힘들어도 사회 속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살 수 있게 교육하라'였어. 그때 힘들었어도 지금 잘 살고 있잖아."
"엄마는 우울증 걸린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어릴 때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 줄 알아? 날 다르게 보는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하루종일 버티고 있어야 됐는데, 그게 어떻게 괜찮겠냐고."
"그럼 너는 지금 둥이를 특수학교로 보내고 싶다는 거야? 넌 그럴 수 있어?"
전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사과드렸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얘기. 대화하는 게 아무 의미 없는 것들.
하지만 둥이가 있으니까, 아직 끝나지 않은 얘기들.
제가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 둥이에게 사실대로 말한 뒤 장애인 등록과 향후 학교 문제를 함께 의논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아직 판단능력이 없는 둥이가 상처만 받게 될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둥이는 오늘도 음식 솜씨가 없는 엄마가 만들어준 반찬을 골고루 잘 먹습니다.
"엄마, 이렇게 잘 먹으니까 키도 크고 ADHD에도 안 걸리겠지?"라고 웃으며 말이죠.
둥이 밥그릇에 반찬 하나 더 얹어주는 것 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전 그저 둥이를 바라보며 웃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