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가 되니 봉고차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들의 시간이 끝났는지 덩치가 제법 큰 남학생들이 건물로 들어갔다. 한 시간 만에 개구쟁이 아이들이 덩치 큰 청년으로 변한 것 같다. 은수와 헤어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면, 작은 꼬마들도 장정처럼 충분히 변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영은 은수에게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다. 만나자고 연락을 한다면, 결국 나는 은수를 만나려고 이곳에 온 것일까, 만나지 않을 거라면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뭘까, 곰곰이 생각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수선한 생각을 접기 위해 E-book 리더기를 켰다. 다영은 최근 종이책 보다 전자책을 더 자주 봤다. 세네 권의 책을 고른 후 그날그날 기분에 맞는 책을 읽는 다영의 독서취향을 맞추기엔 종이책은 너무 무거웠다. 종이책과 똑같진 않았지만 한 장씩 넘기는 느낌도 제법 그럴싸해 외출할 땐 대부분 E-book 리더기를 갖고 다녔다. '내 책장'에 다운로드하여 놓은 책 목록을 살피던 다영은 테이블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손을 멈췄다.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드리우는 흐릿한 그림자가 점점 다영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림자가 테이블에 다가서자 발자국 소리도 멈췄다. 검은색 크록스를 신은 채 하얀 도복을 입고 있는, 누군지 알 것 같은, 자신이 바라는 사람이길 바라며 다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이야. 나 은수."
은수는 일행에게 양해를 구한 후 다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유초등부 수업을 끝내고 사범들과 커피 한잔 마시러 온 은수는 다영을 보곤 당황했지만 곧 편안해졌다. 다영은 항상 갑작스러웠으니까. 갑작스러운 이별 후 갑작스럽게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렇게 자신의 앞에 앉아있으니까. 은수는 그동안 다영을 원망했지만 다영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원망조차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원망하기엔 이십 년이나 지났고 비록 연인이 아니더라도 십 대의 마지막을 함께 보낸 친구였으니까. 은수는 마치 매일 만나던 사람을 만나로 온 듯,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만 있는 다영을 기다려줬다. 천천히 다가서지 않으면 숨어버리는 아이였으니까.
다영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콩닥거렸지만 무슨 말이든 해야 될 것 같았다.
"너도, 거제도도 오랜만이네. 거제도로 오는 배가 없어졌더라. 잘 지냈어?"
"응. 거가대교가 개통되면서 항로 편이 없어졌지. 그런데 여긴 어떻게......"
"그냥. 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여기가 생각나더라고. 와서 보니까 거제도에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구나, 싶었고. 뜬금없지?."
은수는 허리춤에 메인 검은띠를 만지며 도장으로 들어가는 중학교 남학생들을 바라봤다.
"잠시만 기다려줄래? 수업이 남아있어서. 마무리하고 다시 올게."
"널 보러 온건 맞지만, 꼭 만나려고 온 건 아니니까 무리 안 해도 돼. 말하고 나니 더 이상하네."
"괜찮아. 금방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꼭 기다리고 있어."
은수는 누구냐고 묻는 사범들의 물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허둥대며 커피숍을 나가다 다영에게 급하게 다가와 말했다.
"가지 말고 있어야 돼. 꼭.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