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는 다영이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만나자'라는 문자를 보낸 지 한참만에 온 다영의 문자메시지.
'네가 다니는 대학교로 갈게. 진주 경상대학교 맞지? 이번 주 금요일에 수업이 없으니까 오후 2시, 정문 앞으로 갈게.' 은수는 다영의 문자를 받자마자 두근거렸다. 다영이가 여기까지 온다니, 오면 뭘 하지? 날 여자로 알고 있을 텐데, 혹시 화내거나 실망하는 것은 아닐까?
태권도 동아리 친구들에게 학교 근처 맛집과 데이트코스를 물었다. 진주 남강의 오리배, 육전이 맛있는 냉면 집,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학교 앞 새로 생긴 레스토랑, 소파가 편안하다는 비디오방, 서비스가 좋다는 노래방 등 여러 곳을 추천해 줬다. 자신과 똑같이 여자친구 없이 운동만 하던 놈들이기 때문인지 촌구석 진주라서 인지 친구들이 추천해 준 곳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고를 졸업 한 은서가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사람이 많으면 은서가 힘들어할 것 같고 단 둘만 있기엔 어색해할 것 같아서 도무지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럼, 우리 학교 캠퍼스를 걷는 건 어때? 부산엔 캠퍼스가 평지인 곳이 한 곳뿐이라잖아. 학교 앞 아웃백에서 런치세트 먹고 학교로 돌아와 산책하면 어색하거나 복잡하지 않아서 은서도 좋아할 것 같은데."
역시 정혁의 추천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정혁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년 연속 같은 반 친구였다. 태권도와 아이들을 좋아해 관장이 되고 싶다는 꿈도 은서와 같았다. 당연히 다영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정혁은 어느 날 PC통신 친구가 생겼다며, 영화 접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고 들떠 있던 은서의 모습을 기억한다.
"와, 너네 둘. 드디어 만나네. 야, 나도 궁금하다. 나도 같이 보면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네. 절대로 안돼! 몇 년 만에 드디어, 처음 만나는데 너 같으면 같이 보겠냐?"
은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다영이와 둘 만 있고 싶었다. 특히 키고 크고 얼굴도 제법 잘 생겨서 여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정혁과는 절대로 같이 보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금요일이 왔다. 부산에서 진주까지 오기 위해 새벽부터 고속버스를 탄 건 다영인데 정작 바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은수는 일어나자마자 이틀 전 세탁소에 맡겨놨던 남방과 흰 티셔츠를 찾아왔다. 다영이 처음 만나는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올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발장 정리부터 화장실 청소, 집안 정리를 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였다. 약속시간까지 한 시간 남았다. 다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 다영아, 잘 오고 있어?
- 응. 약속시간 맞춰서 갈 수 있을 것 같아.
- 천천히, 조심해서 와.
약속시간 40분 전. 이제 더 이상 할 게 없어진 은수는 집을 나서기 전 거실에 향수를 뿌린 후 환기를 위해 창문을 반 정도 열어놓고 집을 나섰다. 자취방에서 학교 정문까지는 십 분. 한 걸음 한걸음을 세며 걷던 은수는 정문 앞 횡단보도에 멈췄다. 건너편에 있는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수없이 상상했던 다영의 모습과 똑같았다. 살짝 마른 몸에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얼굴이 하얀 편이고 대학생임에도 화장기가 거의 없는 수수한 모습. 청바지에 후드티, 백팩을 메고 있는 다영.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신호등이 바뀌었다. 은수는 횡단보도를 건너 눈여겨봤던 그 여학생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 다영이?"
"네가 진짜 은수......?"
당황하는 다영과 달리 활짝 웃고 있는 은수. 은수와 다영이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