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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름 Sep 16. 2019

뒤에서 오는

시 읽기 - 박세랑 ‘뒤에서 오는 여름’

 

 여름옷을 다시 꺼내 입었다. 가을이 오고 있는데도 오늘은 어느 때 여름만큼이나 더웠다. 가을이 오고 있는데도...




뒤에서 오는 여름

여러 방향으로 꺾이는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

흔들리는 풍경이 다가오는데
여름 안에서 나 혼자 걷고 있었다 여름이 무성하게 이파리를 뿜어내고 그늘을 만든다 삐뚤빼둘 자라난 내가 징그럽게 언덕을 뒤덮고

생각을 길게 이어서 하면

펼쳐놓은 들판이 넘어간다 웃음과 비명으로 풀들이 찢겨 있었다 이파리는 떨면서 바닥에 엎드려 있고, 문장들이 따라붙는 건 모르는 사람의 불행들이지 남의 고통은 문장에게 최고로 인기가 많고

글씨들은 다정한데
감당할 수 없어서 조금 미쳐 있었고

살기 위해 나무는

줄곧 상처 입고 있었다 문장을 오래 들여다보면 전부 징그러웠다 겹겹의 렌즈들로 징그러운 내부를 읽어낼 수 있었다 무서울 게 없었다 두려움을 지나칠 수 있는 슬픔이 더 커져버려서

뭉개진 새를 곳곳에 심어두었다

더는 혼자서 버티지 않아도 돼, 라는 말을 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오래 버려졌던 거니 서늘하게 등뒤가 젖어 있던 날

지나오던 길목에서 죽은 새 한 마리를 본다

익숙한 문장은 겪어본 일들이었다



『문학동네 2018.가을 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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