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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Nov 18. 2023

51.도서관 3분 컷에 산다는 것

<도서관 옆으로 이사와 책부자가 되었다.>


 나 같은 집순이야 회사 외에는 외출할 일도 없고, 가장 좋아하는 소일거리는 독서다. 내게 중요한 건 집 앞의 카페, 마트 같은 편의 시설이 아니었다. 요리할 일도 없고 육아의 의무도 없는, 한량스러운 유부녀탈을 쓰고 회사만 열심히 다녀도 되는 팔자 좋은 인생이라고 볼 수 있다. (요새 하도 힘들어서 이렇게 자조적으로 내 삶을 써봤다. 너 힘들 거 없는 인생이잖아?)

 이렇게 쓰고 보니 참 팔자 좋아 보이긴 한다. 괜히 나 혼자서 지옥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다시 돌아가서, 우리 집은 도서관 3분 거리에 있다.

 아마 책 쟁이들은 부러워서 바들바들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ㅎㅎ)

 도서관이 코앞에 있다는 건 '무한 책장과 개인 사서'가 바로 옆에 있다는 것과 같다. 시시때때로 신간을 들여오고, 도서관에서 추천해 주는 진열된 책에서 보석을 찾아낼 수 있고, 아무도 관심 없는 옛날 책들을 골라서 읽을 수도 있다.

 한 작가에 미쳐 그 작가 책만 10권을 풀로 빌려 읽을 수도 있다. 남편을 가족등록 하면 10권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나의 세금이 첨으로 내게 필요하고 감사한 곳이 쓰임을 느끼는 순간이다.

 

 또한 도서관에 직접 가면 아이들이 그린 귀여운 그림과 편지들도 구경할 수 있다. 내가 가는 도서관에서는 이런 소소한 이벤트나 전시가 꽤 있다. 자녀가 없어서 그런지 아이들의 그림과 글을 보면 그 재치에 놀라고, 새로운 시선이 신선하기만 하다.


 우리 집에도 책이 상당히 많았다. 두 사람이 결혼과 동시에 서재끼리도 결혼을 하게 된다.(비슷한 이름의 책도 있다.)

 취향이 비슷한 우리는 겹치는 책이 많았다. 그 책들을 모두 골라내어 팔거나 기증했다. 나에게 가장 많은 책은 토익, 토플, 텝스 같은 영어 문제집이었다. 이것들은 모두 폐기처분을 했다. 그리고 세상 곳곳을 여행하며 모은 디자인 책들, 이제 좋은 디자인들은 모두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다. 비싸게 사서 이고 지고 한국에 갖고 왔지만 팔 때는 가치를 발하지 못하는 책들은 모두 폐품으로 보내줬다.


 지금의 책장은 아주 간소화되어 있다. 

 읽기 위한 책이라기보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보관하고 소장하기 위한 용도로 비치되어 있다. 지나가면서 '아 저런 작가를 내가 좋아했지?'라며 책등만 보며 흐뭇하게 작품 보듯 스쳐 지나간다.

 앞으로 책장밖으로 나올 일 없이 책등에 보여지는 제목만으로 그 역할을 다 하는 책들이다. 책등에 노출된 한 줄의 타이틀과 작가 이름은 그 자체로도 상당히 힘이 있다. 꼭 읽을 필요도 없이 위로와 힘을 주기도 한다.

 이미 읽은 책을 보관한다는 것은 누군가는 다시 읽기 위함도 있겠지만, 나에겐 제목만으로 짧은 위로를 건네주기 때문이다.


 다양한 주제를 가진 책을 읽는 것이 가능했던 건 도서관이 3분 컷에 있기에 가능했다. 

 절대로 내가 읽을 것 같지 않은 주제의 책도 도서관이 코앞이면 도전 가능하다. 읽다가 취향에 안 맞으면 바로 가서 맞교환이 가능하지 않은가?

 500페이지가 넘는 하드커버 책도 문제없다. 버스를 타고 멀리 가서 대출을 해야 한다면 무거운 책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우리 집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3분만 머리에 이고 지고 오면 된다.


 도서관 바로 옆에 살면서 독서 스펙트럼이 상당히 다양해졌다. 어떤 것과 가까워지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물리적으로 거리를 조정'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책을 좋아해도 도서관이 먼 사람보다, 적당히 책을 좋아하고 도서관이 코앞인 사람은 책과 가까워질 기회가 훨씬 많다.


 집을 구할 때 도서관 30초 컷이 가능한 집도 봤었다. 그러나 그 집 창 밖은 앞집 벽뷰였다. 지금 집은 그보다 조금 멀지만 시원하게 북악산 뷰를 볼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햇살 가득한 국민대와 단풍이 알록달록한 북악산 산등선을 즐기고 있다. 코 앞에 도서관, 눈앞엔 북악산. 미쳤다 이 집.


 도서관 방문은 계획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출근길에 반납함에 책을 톡 넣고 가며 연체를 피하고, 운이 좋다면 퇴근길에 마감 노래가 나오는 타이밍에 부랴부랴 몇 권을 겟할 수 있기도 하다. 역시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은 비장하게 외출할 필요 없이 지나가다가 자연스럽게 들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빌려진 책들은 다음날 새벽에 읽을거리가 된다. 퇴근길의 책 대출은 새벽독서까지 완벽하게 이어진다. 퇴근길조차 완벽한 동선이었다.


 물론 주말 오후, 집에서 잠옷을 입고 뒹굴거리다가 옷을 갈아입고 나가는 것은 약간 귀찮긴 하다.

 주말새벽 캄캄할 때 운동을 하고 돌아와도 도서관은 아직 오픈하지 않았다. 두 번 외출해야 하는 귀찮음이 있다. 아무리 도서관이 바로 코 앞이라도 집순이에게 하루 외출 2회라뇨??? 




 그래 내게 힘들게 뭐가 있겠어. 제사 없는 집에 시집와 집밥을 싫어하는 천운 같은 남편을 만나, 출산과 육아의 의무도 없이 내 맘대로 살기만 해도 되는 어려울 것 없는 인생을 즐기면 된다. 이 안에서 내가 힘들다 징징대면,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다. 

 사회생활은 누구나 힘들고, 다들 나름의 어려움을 견디고 있다. 어제 밤새 악몽에 자다 깨다 수많은 직장 동료들과 친척들이 등장했다. 현실 속의 인간 존재들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너무 괴롭게만 한다. 

 품에 따뜻한 고양이를 안고 빨리 책 속으로 도망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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