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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Apr 04. 2019

비관주의자가 낙관주의자를 만났을 때



어떤 일을 앞두고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건 버릇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열심히 공부한 과목에서 실수를 하거나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 (그것이 친구든 연인이든)으로부터 일방적 이별을 통보받은, 그런 날들이 있었을 뿐이다. 애정을 쏟은 만큼 멀어지는 경험은 생각보다 더 힘들었지만 이마저 반복되니 조금씩 내성이 생길 수 있었다. 그렇게 언제부터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비관적인, 내게는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런 내 모습이 싫지 않았다. 최악을 예측하니 어떤 결과가 나타나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기에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첫 연애를 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미국에서 어학연수 중이었다. 그 사람을 만났을 즈음은 채 몇 달 밖에 남지 않은 귀국을 앞두고 몸과 마음이 복잡한 때였다. 트렌드에 민감하며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그 사람과 단골 카페만 가거나 미국까지 와서 방에 처박혀 영화를 보는 나는, 한국이었다면 절대 마주치지 않았을 정도로 극명하게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타지 생활의 외로움과 겨울의 시카고가 주는 낭만은 낯선 남녀의 마음에 설렘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생각해보면 그가 처음부터 나의 비관적인 태도를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 언젠가, 인생은 어차피 우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코미디 영화를 좋아하는 게 신기하다는 그의 말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었다. 인생이 우울하니까 그만큼 웃음의 소중함을 더 느끼는 것 같다고. 그는 이런 내 생각이 흥미롭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신이 나 한참을 내가 얼마나 비관적인지 떠들어댔던 기억이 난다. 연인이 된 후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늘어가며 그는 조금씩 이런 내 모습에 거부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창 진로 고민을 하던 시기였던 우리는 종종 한국에 돌아가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그때마다 걱정과 불안부터 앞섰던 나와 달리 희망찬 미래를 꿈꾸던 그와의 대화는 번번이 미끄러졌다. 그런 나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너랑 있으면 나까지 불행해질 것 같아."








밝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어려웠다. 그들의 기운으로 함께 밝아지는 것이 아닌 나의 우중충한 기운이 그들에게 전염되곤 했다. 가끔 만나는 지인들에게는 조심하면 얼마든지 감출 수 있었지만 하루 종일 연락 하며 일상을 공유하는 연인에게까지 본모습을 숨기기란 쉽지 않았다. 달콤했던 첫 연애가 끝난 뒤 처음으로 내 성격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나의 비관적인 태도가 그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지금껏 일방적으로 나를 떠났다고 생각했던 이들도 같은 이유에서였을까. 관계를 끝낸 쪽은 그들이 아니라 나였다. 내가 정말 좌절했던 순간은 그렇게 처참한 말을 들으며 이별을 당했음에도 스스로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할수록 자꾸 지치고 도리어 한없는 우울 속으로 침잠하곤 했다. 결국 비관적인 태도가 가장 나답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면 반드시 같은 성향의 사람을 만나리라 마음먹었을 때, 낙관주의의 끝판왕 지금의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남자 친구는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가 나와 정확히 반대였다. 지금까지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거의 없는 데다 운 마저 좋은 편이었던 그와의 데이트는 즐거웠고 대화도 잘 통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가 정말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연애를 시작하고 1년여의 시간 동안 예민하게 발톱을 세우고 평소보다 더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던 건, 정말 나쁘지만 일종의 시험이 맞았다.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그로 인해 상처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사이라는 냉소적인 말들을 견디다 못한 남자 친구가 처음으로 서운함을 토로하던 날, 역시 이럴 줄 알았다고 나를 알지 못한 채 좋아하는 모습만 보던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며 모진 말들을 쏟아내 버렸다. 정말 끝이다. 최악이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소중한 관계를 망쳐버렸다는 자괴감과 두려움에 덜덜 떨던 나를 한참 동안 지켜보던 그는 가만히 내 이름을 불렀다. 순간 너무나 따뜻한 목소리에 왈칵 올라올 뻔한 눈물을 겨우 누른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마주했던 그의 표정을, 그의 눈빛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경멸도 연민도 아니었다. 그건 사랑이었다. 그토록 갈망했던, 나의 이런 모습마저 받아들여 주기를 바랐던, 어쩌면 영원히 볼 수 없을 그 눈빛으로 안아 주었을 때 수년간 스스로를 옭아매던 자책의 시간이 비로소 멈췄다.








7년 동안 함께하는 지금까지도 남자 친구는 여전히 낙관적이고 나는 비관적이다.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은 결과였다. 대신 서로를 다루는 기술이 늘었다. 그는 내가 한없는 우울에 빠질 때면 스스로 나올 때까지 묵묵히 곁을 지켰고 비관에 가득 차 날 선 말들을 쏟아낼 땐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며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음껏 보여주어도 정말로 괜찮았다. 인생에 대한 개인의 태도는 관계와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건 상대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있었다.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데에는 어쩌면 누구의 잘못이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세계를 서로가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감당하기로 했는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무섭도록 현실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인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첫 남자 친구의 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첫 연애에 실패한 건 나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비관주의자여서 떠난 것이 아니었다. 이 세계를 받아들일 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이제는 상대의 성향을 파악하는데 집중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비관 일지 낙관 일지 모를 미지의 세계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야말로 진정한 관계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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