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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Feb 24. 2019

그 진창을 너와 함께 하고 싶어



헤어짐을 말하려던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최대 관심사는 사랑이었다. 관심의 정도와 인기는 비례하지 않았기에 주로 짝사랑이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을 열렬히 사랑했고 학교를 벗어나면 연예인에 탐닉했다. 대학에 와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곳을 바라보았고 가뭄에 콩 나듯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생겨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생애 처음으로 '문어발식 썸'까지 탔던 전성기 때조차 관계는 계속 어긋났고 아무래도 이번 생은 틀린 것 같다며 포기하던 바로 그때, 지금의 남자 친구가 나타났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는 건 자신을 잘 모른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짝사랑은 혼자 하는 사랑이라 감정 컨트롤이 잘 될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난폭해질 수 있고 욕망에 솔직하며 헌신적일 수 있다는 것을 연애를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비슷해서 끌렸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하게도, 우리는 너무도 달랐다. 그는 다정하고 따뜻했지만 내면이 드러날까 날을 세우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데 능숙했지만 그만큼 상대 역시 솔직하기를 강요했다. 남자 친구의 존재가 커질수록 표정 하나, 메신저의 글자 하나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점점 더 서로를 아끼고 그만큼 전쟁 같은 사랑을 하는 시간이 쌓이며 자연히 함께 하는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으레 이렇게 흘러가는 건가 싶던 어느 날, 결정적으로 이 사람과의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찾아왔다.



연애 5년째 되던 해, 큰 마음먹고 일본 여행을 가기로 했다. 각자의 바쁜 시간을 쪼개 만든 소중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오랜만의 여행을 앞두고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였을까, 야속하리만치 더웠던 일본의 날씨 탓이었을까 조금 예민해져 있던 우리는 초반부터 삐걱대기 시작했고 결국 마지막 날 저녁, 전에 없이 크게 싸우게 되었다. 늘 그랬듯 사소한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날은 달랐다. 표현은 걷잡을 수 없이 격해졌고 결국에는 늘 받아 주는 쪽이었던 남자 친구조차 이 날만큼은 감정이 널뛰었다. 정말이지, 이제 전부 끝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밑바닥까지 보는 날이 오다니. 아니, 이게 밑바닥이 아니면 어쩌지. 여기서 더 가면 서로 최악의 모습만 남고 좋았던 시간마저 망가질 것 같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 후 ‘헤어지자’ 고 입을 떼려던 순간, 갑자기 남자 친구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아 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자존심을 내려놓았고 결정적인 때에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후 오래도록 우리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대화를 이어 갔다. 서서히 마음이 풀리기 시작하고 눈을 바라 보고 마침내 서로 엉엉 소리 내어 울며 보냈던 그 길고 긴 밤, 나는 이 남자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마지막 장면에서 서로의 아팠던 기억을 지우는 데 실패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다시 마주한다. “난 완벽하지 않아. 결국 거슬려할 테고 난 당신을 지루해할 거야” 클레멘타인의 말에 조엘이 답한다. "그럼 어때”



10대 시절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힘들 것을 뻔히 알면서 다시 서로를 택하는 주인공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전 재개봉한 <이터널 선샤인>을 극장에서 보았고 마지막 조엘의 대답에서, 그만 오열하고 말았다. 서로를 향한 감당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이, 무의식에서조차 지키려 발버둥 쳤던 사랑의 시간들이 온몸을 휘감아 버려서. 다시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감당하고 다시 또 한 번 사랑을 선택한 연인에게 조엘의 마지막 대사는 모든 불안을 덮어 버리는 따스한 치유였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 사람과 결혼을 결심한 이유였다. 나는 너를

선택했다.



앞으로도 내 연애는, 내 사랑은 진창일 거야. 하지만 나는 그 진창인 세상을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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