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웨딩 촬영을 앞두고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건 의상 준비였다. 넓고 넓은 쇼핑몰과 넘쳐흐르는 옷들 중 마음에 쏙 드는 옷을 찾기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미션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웨딩 컨셉으로 찍을 흰 원피스만큼은 꼭 필요했기에 이번 주말도 인파를 뚫고 흰 원피스를 찾아 헤매느라 너덧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서울 내 최대 규모라는 쇼핑몰의 모든 매장을 샅샅이 뒤지고도 원하는 것을 찾지 못 하고 '다음을 기약하자'며 돌아서던 순간, 사라졌던 그가 나타났다. "이건 어때?" 깨끗한 흰색, 귀여운 레이스 디자인에 가벼운 소재, 딱 떨어지는 길이와 네크라인까지. 내가, 아니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원피스였다. "으음! 너무 예쁘다. 진짜 딱이다." 피팅룸의 문을 열자마자 보인 그의 눈빛, 표정, 말투 모든 반응은 기쁨을 배가 시키기에 충분했고 만족스럽게 쇼핑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 날 집으로 가는 내내 가슴이 벅차올랐던 건 다섯 시간 만에 찾아낸 원피스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는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게 된 남자 친구에게, 서로만이 알 수 있는 미묘한 분위기를 완전히 파악하기까지 쌓아온 시간에 감동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는 ‘충분한 대화를 통해 주고 받은 정보’가 있었다.
연인으로 발전하기 전 특히 ‘썸' 단계에서는 상대의 호감을 사기 위해 본능적으로 비슷한 부분을 보이고, 보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우리 역시 그랬다. 술을 좋아하고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다. 대낮부터 시작된 데이트는 카페 영업 마감시간이 되어야 끝났고 새벽까지 메신저로 대화를 하다 잠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살아온 배경이 이렇게나 다른 우리가 얼마나 닮은 점이 많은지 매일 같이 달콤한 숨은 그림 찾기를 했다. 그러나 연인이 된 후 신기하리만치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남자 친구라는 어마어마한 세계의 일각에 불과했고 그 몇 배가 되는 다른 부분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지인들과의 술자리를 좋아하는 남자 친구와 달리 나는 술 자체를 좋아해 곧잘 혼자 마셨고 여러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원하는 그를 특정 사람들 외에 무신경한 내가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짜 대화가 필요한 순간은 여기서부터였다.
주로 대화를 원하는 쪽은 나였다. 연인이라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남자 친구는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는 성실한 청취자였다. 시시콜콜한 일상을 얘기할 땐 리액션에 충실했고 중요하고 문제를 꺼내면 현명한 의견으로 결정에 도움을 주었다. 남자 친구는 굵직한 이야기들을 잘해주었다. 어렸을 적 상처, 내밀한 속마음 등 대부분의 이들이 어려워하는 이야기를 기꺼이 나누는 대신 그는 '사소한 일상을 나누는' 데 취약했다. 그 일상을 정말 시시콜콜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대학생 때였을까, 용돈의 대부분을 핸드폰 요금으로 아무렇지 않게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던 적이 있었다. 줄여야 하지 않겠냐며 잔소리를 했지만 바뀌지 않는 태도가 어리석다고 생각되었고 급기야 화가 나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그에게는 등하굣길, 또는 집까지 바래다준 뒤 약 1시간이 넘는 귀갓길에 좋아하는 가수의 무대 영상 즐겨 보는 취미가 있었고 그러려면 넉넉한 데이터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매일 서너 시간 동영상으로 감상하는 일상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너무 아무 일도 아니어서 말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나는 그 아무 일도 아닌 일을 듣고 나서야 남자 친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매달 영화 관련 취미로 (다른 사람이 보기에) 과한 금액을 지출하면서 당연히 여기는 것처럼 그에게도 당연한 일상이었을 뿐이었다. 그건 결코 사소한 일상이 아니었다. 너무나 중요한 디테일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남자 친구는 그 날 하루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나누려 노력했고 지금은 나보다 더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눠서 중간에 끊어 주어야 할 정도이다. 덕분에 서로에 대해 더욱 촘촘히 알게 되었고 우리만 알 수 있는 행간의 의미들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결혼 준비를 하며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을 때 이 시간들은 주위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 다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기도 했다. 어쩌면 두 사람을 이어주는 건 인생의 변곡점이 될 만한 커다란 사건들이 아닌 매일매일을 지탱하고 있는 일상, 자잘한 디테일을 차곡차곡 나누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그렇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물론 모든 연인에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백 쌍의 커플이 있다면 백 가지의 사랑이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연인 간의 충분한 대화만큼이나 더 나은 관계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처음부터 말하지 않아도 아는 관계는 없다. 그러니까 할 수 있다면, 더 많이 대화하라. 사소해 보이는 것일수록 더 나누어라. 연인의 취향을 더 잘 파악해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할 수 있다면, 상대의 기분을 완벽하게 배가 시키는 법을 터득해 좋은 날을 환상적인 날로 만들 수 있다면, 오래도록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확실한 방법이 대화라고 한다면 꽤 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