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일하는 원어민이 영 시원치않게 협조하는 바람에 일의 진행이 늦춰지고 있다. 학교 측과 면접을 마친 뒤 잡오퍼를 받고 계약서까지 꼼꼼히 보면서 잡오퍼를 수락하길래 '아, 꼼꼼한 애구나. 이번에 채용되겠다' 싶었는데. 사실 잡오퍼 수락은 전체 과정의 절반 정도 되는 단계일 뿐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비자 과정과 온갖 서류 준비 과정이 있는데 보아 하니 원어민이 서류 준비도 안 되었을 뿐더러 애초에 마음가짐이 영 아닌 것이다. 답변 온 것을 보니 지금 스웨덴 여행중이라고. 아무래도 첫 채용확정은 물 건너간 것 같다. 동기는 다음 단계로 쭉쭉 잘만 나아 가던데 나는 왜 이럴까.
생각해보면 나의 모든 처음은 쉽지 않았다. 빙판 위를 가르는 시원한 기분이 좋아 시작한 스케이트였지만 경쟁의 세계는 얼음만큼이나 차가웠다. 첫 시합에서 메달권은 커녕 체력이 달려 겨우 결승선을 끊었다. 모두가 넘어지지 않고 완주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 해주었지만 그 시합에서 메달을 딴 아이도 첫 시합에 나와 동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잘 지내(고 있다고 믿었)던 나의 첫 단짝 친구는 어느 날 내게 ‘부담스럽다’는 말 한 마디를 남긴 채 사라졌다. 처음으로 손편지를 주고 받고 집에 놀러가 가장 아끼는 만화책도 보여 주며 비밀 이야기를 나눴던, 그 아이와 함께 했던 오래오래 지속될 것만 같았던 시간은 그렇게 멈추었다. 학창 시절을 지나 어설픈 사회인이 되며 또다시 무수히 많은, 가혹한 처음들을 마주했다. 인생의 첫 고비였던 수능부터 스스로가 한없이 보잘 것 없게 느껴지던 첫 사랑, 10여년동안 갈망해오던 꿈을 단번에 휘청이게 했던 첫 취업 등.. 내 처음은 그렇게 나를 훈련시켰다.
우리의 결혼이 쉽지 않았던 건 처음이어서다. 나는 처음이 어려운 사람이라 그런 나와 함께 하는 너의 처음도, 안타깝지만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가 마주할 처음이 어떨지 솔직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설 때도 있다. 그래도, 그럼에도 내 모든 처음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처음은 처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더 이상 말없이 떠난 첫 친구를 원망하지 않는 것처럼 첫 사랑이 있어 다음 사랑을 할 수 있었고 첫 회사를 다니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들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몰랐던 세계를 알게 해주는 것 - 처음의 역할은 그 뿐이다. 앞으로 처음을 곱씹는다면 그것은 앞으로의 날들이 조금 덜 아프도록 하기 위함이겠지. 나는 이 소중한 첫 실패들을 영원히 곱씹고 또 곱씹으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