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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May 01. 2019

‘비포 시리즈’가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이야기

 



*본문은 문화잡지 CULTURA 의 4월 테마 - Romance 에 게재된 본인의 글을 가져온 것이며 출처는 본문 아래에 명시해 두었습니다.






4월의 캠퍼스는 사랑의 기운이 완연했다. 하나, 둘 연애를 시작한 동기들을 축하할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쓰려 왔다. 새내기의 기적이 모두에게 일어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맥주 없는 치킨 만큼이나 맥이 빠지는 로맨스 없는 대학 생활을 보내던 내게 유일한 설렘이라곤 자리가 남았다는 이유로 신청한 교양 수업 ‘영화 영어’ 시간이 전부였다. 유럽의 어느 소도시에서 유학했을 것만 같은 교수님은 그 분위기만큼이나 매시간 멋진 영화들을 소개해주곤 했다. 신입생의 눈높이에 맞춘 건지, 실패할 확률이 낮아서였는지 장르는 주로 멜로였고 덕분에 한 학기 동안 세상의 모든 러브스토리를 만날 수 있었다. 로맨틱 코미디계의 조상 격인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노팅힐> 등을 비롯해 유수의 아름다운 작품 중에서도 단번 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비 포 시리즈’였다.
 


나는 독립적인 여성이지만 사랑받고 사랑을 하는 건 내게 너무나 중요해.

  다시 생각해도 대학 교양 수업의 자료로 쓰이기에 <비포 선라이즈>(1995)는 지나치게 로맨틱했다. 우아한 빈의 풍경과 스크린을 가득 채운 에단 호크의 무구한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설렜지만 정작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내 머릿속에는 온통 줄리 델피 뿐이었다. 비포 시리즈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받는 영화로 매김 한 데에는 단연 셀린(줄리 델피 분)의 지분이 8할 이상이었으리라 감히 단언하고 싶다.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대상 앞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분명하게 말할 줄 아는 모습은 당시까지 미디어가 그려왔던 멜로 영화 속 여성 주인공의 이미지와 분명 결을 달리하고 있었다. 셀린과 나누는 대화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받아들이던 제시(에단 호크 분)는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었고 지금의 연인에게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운동선수였던 어린 시절부터 줄곧 독립적인 여성에 대한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유의미한 내 몫을 해내고 싶었고 할 수 있는 리더의 자리는 적극적으로 얻어냈다. 짝사랑할 때조차 상대가 나의 매력적인 모습을 제대로 본다면 마음이 움직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받는 한 여자의 삶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런 나와 기꺼이 밤새워 대화할 수 있는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해 줄 연인을 간절히 원했다. <비포 선셋>(2004)에서 9년 만에 재회한 제시에게 셀린은 ‘나를 먹여 살려줄 남자는 필요 없지만 나를 사랑해줄 남자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혼자로도 충분한 존재를 지속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최고의 조력자, 내게 연인은 그런 것이었다.

 

Not perfect, but it's real

 제한된 시간 속 애틋했던 연인은 결혼으로 영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로맨틱한 장애물을 걷어낸 현실 속엔, 육아로 인해 독립적인 삶에서 멀어진 여자와 다정한 목소리 대신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남자가 있었다. 최근 남자친구와 결혼을 준비하며 무수 한 선택을 해야 했다. 경우의 수까지 나열하며 어느 쪽이 더 완벽한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줄 것인지 그토록 고심했던 이유는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영원의 시간 속 권태를 마주해야 할 수도 있고 원치 않는 희생을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다 서로가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결국 우리는 다시 대화를 시작할 것이다. 행복할 수 없다면 행복해지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완벽한 꿈이 아닌 불완전한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진짜 삶’ 이라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18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비포 시리즈가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출처: http://www.cultur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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