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내게
자아 존중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자존감이라는 키워드가 급부상했다.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love yourself를 외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열렬히 사랑하고 싶지만, 그럴수록 나에게 부족한 스스로가 미워지기도 한다. 정말 나는 숨만 쉬어도 가치 있는 존재일까.
자아 존중감은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감정 및 태도’라고 한다. 심리학에서는 자존감이 높아지기 위해 자아 효능감(능력에 대한 신뢰), 자기 존중감(존재에 대한 존중), 자기 수용(조건 없는 수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 경우를 생각하면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붙잡을수록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억지로 감사를 찾았고, 매일 ‘우울하다’를 반복하는 감정일기를 쓰기도 했다.(정확히는 감정쓰레기통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 노력들이 헛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나는 나 자신에게 따뜻해지고 싶었으니까.
최근의 나는 행복에 가깝다. (그만큼 시가 잘 안 써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바쁜 와중에도 평화를 유지한다. 약의 도움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나를 버겁게 하던 인간관계에서 벗어난 것이 크다. 삶의 많은 시간을 외로움을 이유로 나를 소중히 대하지 않는 사람들을 곁에 두었다. 인간관계에 유통기한이 있다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나를 갉아먹는 관계를 붙들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 잘못이었다. 그 사실을 25년 동안 몸소 배웠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내가 나와 가장 친해지고 나서야 가능해졌다.
나이가 들어 체력이 부족해져서 인지, 이제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예전만큼 쉽지 않다. 사회성이 자랄수록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신경 쓰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쉽게 지친다. 그래서 나는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가장 편해졌다. 내가 언제 불편한지, 무엇이 힘든지 알아차리고 내 눈치만 보면 되기 때문이다. 이게 자의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는 나를 편안하게 하는 능력치 하나를 얻게 되었다.
잠을 충분히 자고,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는 것 역시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하루 네 시간씩 자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의 나는 늘 날이 서 있었다. 삶의 질이 얼마나 무너져 있었는지 최근 들어서야 알았다. 가벼운 운동이 우울증 약만큼 효과를 낸다는 연구가 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운동 직후의 상쾌함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선행된 후에야, 나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감사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번아웃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물론 나는 나라는 이유로 소중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하지만 그 성실함이 결국 나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내가 소중하기에 세상에서도 예쁨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다만 그 속에 잠식되어 세상의 틀에 나를 끼워 맞추기 위해 불안에 떨고 싶지는 않다.
나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제는 자존감이라는 단어에 매어있지 않는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앞으로도 어려움은 계속되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온 내가 앞으로도 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